본문 바로가기

내가 본영화,읽은책

블랙코미디에 대한 편견을 없애준 소설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2년전에 봤던 한국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장 진 감독의 '퀴즈왕', 그리고 댓글 영화평에 남겨져 있던 짧고 굵은 한줄의 네티즌 평가 '쓰레기 오브 더 쓰레기.' 사실 그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느꼈던 내 감정도 그 네티즌 못지 않았다. 이건 뭐... 웃자고 만든 영화인지, 아니면 사회부조리에 분개하자고 만든 영화인지, 웃기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뭔가 메시지를 주려는듯 하는데 또 그게 너무 약하고. 그럼에도 영화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잘 만들어진 블랙 코미디라고 평가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후로 블랙코미디라는 이름이 붙여진 영화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소설이 바로 블랙코미디 장르 소설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기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면...



가는 다니엘 포르.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베네수엘라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광고계에 입문했다. 알제리, 베트남,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생활하다가 동료들과 광고회사 M&C Saatchi.GAD를 설립했고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요즘 자주 보는 직업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문학박사에다 광고계에서 잔뼈가 굵은 작가의 이력이다. 흔히 광고계 출신이라고 하면 빠른 템포안에서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모습이 상상된다. 그래서 더 감각적이고, 화려하고, 관객이나 독자들의 정서를 파고드는 감독이나 작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영화계에서도 CF감독 출신들이 만든 영화는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전개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에서도 밋밋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화끈한 사건이나 긴장감 넘치는 전개 과정없이 무뚝뚝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 않다. 거의 한 페이지에 하나 이상의 죽음이 등장하고, 거론되고 있고, 주인공의 주위사람들이 끊임없이 갖가지 사연으로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의 소재로 사용될 죽음에 유머를 입혀 독자로 하여금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는 꽤 계획적인 작가의 의도이고 그런면에서 성공했다.

 

 

정말 그랬다. 책 제목에서 무슨 철학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단순하게 실제 책 한페이지에 죽음이 하나씩 등장한다. 그래서 책 제목이 정해진 거다. 그 제목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말지어다. 예전 학창시절에 잠깐 사겼던 여학생이 생각나 다시한번 잘해 보려고 찾아갔더니 그 애가 죽었다고 오빠가 전해준다. 그것도 바로 어제! 어떻게? 호랑이에게 물려서. 아니 사실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단다. 도시 한복판에서 무슨 호랑이에게 잡아먹혔을라고. 그런데 사실이다. 우울증에 빠져있던 옛여친이 동물원에 놀러갔다가 기르던 고양이를 호랑이 우리에 던지려 했고, 이를 보고 놀라 제지하려던 어떤 남자가 달려드는 통에 중심을 잃고 고양이, 여친, 남자 셋이 나란히 호랑이 우리에 떨어졌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굶주린 호랑이 두마리가 각각 여친과 남자를 공격해 잡아 먹어 버린 것이다. 오직 고양이만 이 틈을 타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끔찍한 죽음인데 이를 희화화 시켰다.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이 소식을 나에게 전해줬던 옛여친의 오빠가 또다른 내 옛여친의 남편이었는데 의처증에 시달리다 부인을 권총으로 살해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경찰에 자수한 옛여친의 오빠가 죄책감에 수사를 받던 도중 창으로 몸을 던져 자살해 버린다. 이렇듯 무수히 많은 죽음이 등장하지만 어느 하나 심각하지가 않고, 공포스럽지 않다.

 

 

그리고 소설을 풀어 나가는 1인칭 주인공 '나'는 한심하기 이를데 없는 불쌍한 청춘이다. 약혼자에게 차인 이유는 참을수 없는 겨드랑이 악취 때문이었고, 약혼자와 헤어진 후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 헤어졌던 옛 여친들의 연락처를 찾아내 하나씩 찔러 보는 짓이다. 또 여자와 어울리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클럽을 찾고, 술집을 찾고, 부킹을 한다. 그러면서 여자를 꼬시기 위해 치밀한 멘트와 행동 계획을 수립하지만 하나같이 느끼한 멘트와 허접한 행동 뿐이고 여자들은 질색을 하고 달아나기 바쁘다. 겨우 꼬시는데 성공한 여자와는 키스를 하다 입냄새에 놀란 여자가 도망가 버리기까지~ 차인 약혼자와의 감격적인 재회를 꿈꾸는데 정작 나오는 말은 마초적인 허풍과 빈정거림 뿐이다. 소설속의 주인공은 아메리칸 히어로거나 완벽에 가까운 외모와,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남자들이다.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고, 엄청난 추리력에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진력까지 갖춘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속 주인공 '나'는 참 한심하지만 그러기에 낯설지 않고 친숙한 모델이다. 소설속 주인공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현실속 우리같은 보통 남자에 가까우니 말이다.

 

 

이 책의 또 하나 특징은 제목의 한페이지에 죽음하나를 증명하듯 맨 마지막에 소설속에 등장하는 죽음들을 페이지와 함께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따로 목차가 없는 이 소설의 목차 역할도 하고있다. 다만 목차가 책머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맨 끝에 나오는 셈이다.

 

결코 유쾌한 소설은 아님에도 유쾌하게 읽었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앞서 언급했던 한국영화 '퀴즈왕'과 같이 희화화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퀴즈왕'이 다분히 억지스럽게 희화화 하려해서 반감을 샀다면, 이 소설에서는 자연스러운 희화화를 통해 독자들의 거부감을 없앴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수 있다. 그 덕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선입견도 없어지게 됐고. 가볍게 읽을만 한 소설이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국내도서>소설
저자 : 다니엘 포르(Daniel Fohr) / 박명숙역
출판 : 문학동네 2012.08.06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