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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춘천 역전파출소 소장 딸 강간살인사건 실화를 다룬 소설 '뿔'

 1972년 9월 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서는 지금껏 듣도보도 못했던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파출소 소장의 딸이 논둑에서 강간당한 후 목이 졸려 숨진채 발견된 것이다. 지금이야 심심치 않게 잔혹범죄들이 뉴스에 보도되곤 하지만, 당시에는 온 국민을 경악시킨 끔찍한 아동상대 성범죄 및 살인사건이었다. 특히 피해자가 파출소장 딸이라는 점,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제정을 앞두고 입법, 사법, 행정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채 강력범죄 근절을 부르짖던 시기에 발생했던 터라 정부는 이 사건을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범인 검거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가 어떤 시기였는가. 마을 남자들 모두를 피의자로 보고 강도 높은 수사를 했지만, 수사에 어려움을 겪자 10월 2일 내무부 장관 김현옥은 특별담화를 통해 10월 10일까지 범인을 잡지 못하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는 내용을 하달한다. 이제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잡았다고 해야될 실정이었다. 그리고 마치 코미디 프로를 찍듯 경찰은 10월 10일 마감시한을 맞춘 신문사 원고처럼 범인을 검거했다고 언론에 발표한다. 정원섭씨는 이렇게 조작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아동강간 살인범이 되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을 복역하게 됐다. 그리고 2008년 10월, 이미 재판이 끝나고 복역까지 마친 이 사건이 다시 재심 절차에 의해 춘천지방법원에서 심리가 열리게 된다. 이 소설은 이렇게 '춘천 역전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의 피의자 정원섭씨 사건의 실화를 바탕으로, 여기다 작가 임은정이 허구로 만들어낸 정원섭의 사랑이야기를 추가시킨 소설이다.

 

 

나 역시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를 통해 이 사건을 알게됐고, 재심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정원섭씨의 인터뷰를 들었던 적이 있다. 38세 나이에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신앙심을 바탕으로 모범수로 특별 감형을 받았어도 15년 넘게 옥살이를 했으니 국가에 대한 그 분노와 억울함이 어떠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갔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말투는 담담함 그 자체였다. 이제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할 젊음마저도 세월속에 지나버려 초연한 노인의 추억을 듣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나이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이 나던 2011년 78세였으니 무슨 회한과 분노가 남아 있을까. 오히려 그는 '용서'라는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자신을 고문해서 거짓 자백하게 만들었던 수사관들, 알리바이를 뻔히 알면서도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대 형사들이 두려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 진술했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맞은 사람이 먼저 용서하고 싶다는 얘길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하지만 용서를 하고 싶어도 잘못한 이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어야 용서할 것이 아닌가. 어렵게 기회를 잡은 재심에서도 검사쪽에서는 무죄라는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작게는 개인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지만, 크게는 국가의 폭력, 재판부에 대한 불신을 담고있다. 개인이 잘못하면 법의 판단을 받아 죄값을 치루겠지만, 그 잘못을 판단하고 처벌하는 재판부가 잘못을 할 경우엔 어떻게 바로잡을수 있을 것인가! 이는 얼마전 개봉했던 영화 '부러진 화살'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이 사건으로 한 사람의 일생이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정작 안타까운건 한사람의 인생만 망가진게 아니라는 점이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고, 자식이고, 신학대를 졸업한 종교인이었던 정원섭씨가 끔찍한 살인마라는 재판결과는 아이들을, 아내를, 부모를, 같은 종교인들을 수렁에 빠뜨리고 평생 씻을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정원섭씨가 수감되고 그의 가족들은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쫒겨나야 했다. 또한 가장이 순식간에 사라진 가정은 아내를 행상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은 고아원을 전전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과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한 죄없는 사람과 가정을 파탄시키고 죽음보다 더한 불행속에 살아가게 만든 국가의 잘못에 대한 보상은 어떡해야 만회될수 있을까.

 

정원섭씨는 스스로 억울함을 증명할 길도 없었다. 사건 직후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도 항소를 기각당해 그대로 형을 살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만기출소한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기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재심 청구를 위한 준비에 몰두했다. 변호사들은 정원섭의 사건 기록을 찾으려했지만 1994년 보존기간 경과로 사건기록이 폐기되어 남아있지도 않았다. 다행히 사건직후 항소심을 도와주었던 이범열 변호사가 사건기록을 복사해 놓은것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재심을 청구하지도 못해보고 진실이 묻힐 판이었다. 정원섭의 도움요청을 받은 동아일보사에서도 법률팀이 취재에 나서 재판당시 증언했던 증인들의 위증사실을 보도했고, 방송에서도 그 사건을 다뤘는데 경찰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이들이 거짓 증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정원섭을 고문했던 경찰 당사자들도 시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법부는 재심 청구를 쉽게 받아들여지주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증인들의 기억이 그때보다 지금이 정확할리 없다는 점, 당시 증언들이 허구라고 인정할만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는점을 들어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2001년 10월 4일의 일이었다. 오직 명예회복을 위해 뛰어다니던 정원섭과 가족들에게 또다시 좌절을 안기게 된 사법부였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생겼다. 이미 형기를 채웠고, 억울하다며 신청한 재심청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라는 것을 만들고 <과거사정리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자신의 누명을 벗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청원서를 제출했고, 위원회에서 청원서를 접수하고 정식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치명적인 당시 재판의 오류를 찾아냈다. 당시 시신에서 채취한 음모를 분석한 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범인이 A형이라고 밝혔지만, B형인 정원섭을 범인으로 만들려 작정했던 경찰과 검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재판과정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또 시신이 처음 발견됐을때 현장에서 수거한 연필과 빗등의 증거품들이 수사과정에서 정원섭의 집에서 가져온 연필과 빗등으로 뒤바뀐 사실도 밝혀졌다. 마침내 2007년 11월 20일 위원회는 "정원섭의 어린이 강간 및 살인죄에 대한 재판 사건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및 증거조작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사과와 재심을 권고한다"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법부는 끝까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8년 10월 24일 재심 사건이 배정된 춘천지방법원에서 검사들은 31년전 원심때와 마찬가지로 유죄를 주장했다.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증인으로 나온 당시의 증인들은 경찰과 검찰의 폭력과 강압에 의해 거짓진술을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1심 판결은 "폭력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고, 불법적이며 야만적인 경찰의 증거조작이었음에도 이를 간과한 원심은 잘못되었다"고 판결한다. 그러나 검사들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 2009년 2월 6일 항소 재판부는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고 원심의 판결을 다시 확인했다. 그래도 검사들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한다. 이후 2년 6개월이 넘도록 대법원은 판결을 유보하자 78세였던 정원섭이 "대법원이 사건을 진행하지 않고 침묵하며 죽기를 기다리며 자연면소를 만들려는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접수했다. 2011년 10월 27일 마침내 대법원은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며 최종적으로 피고 정원섭의 무죄를 선언했다. 이는 시국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에서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일이었다.

 

지금도 정원섭씨는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억울함은 죽을때까지 풀지 못하고, 자손들 역시 살인자의 후손이란 멍에를 지고 살았어야 했을터다. 또한 과거에, 혹은 지금도 제2의 정원섭, 제3의 정원섭처럼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수 있을까! 특히 70년대 검찰이나 지금의 검찰이나 정권에서 독립하여 공명정대하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조직이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검찰이 그 당시와 지금 달라진건 뭐가 있을까.

 

뿔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임은정
출판 : 문화구창작동 201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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