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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느림의 미학, 전주 한옥마을 즐기기

친구네 가족과 함께 나들이 계획을 잡고 봄철 휴일날, 그래도 상춘객이 뜸할 것으로 생각한 보성 대운사로 향하던 중에 광주에서 화순을 통과하는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급 계획을 변경하여 전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4월 중순의 일요일이었다. 바로 전날인 토요일에는 남부지방 최대의 벚꽃 관광지인 하동 쌍계사에 함께 가려고 각각 가족들과 함께 출발했다가 길에서 매연 나오는 앞차 꽁무니만 쳐다보길 몇시간,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전날에 이어 다음날도 역시 또 목적지를 포기하고 차를 돌리게 됐으니 역시 주말엔 어디 나다닐게 못된다는걸 절실히 깨닫는다. 멋진 경관, 귀한 볼거리 다 필요없다. 그저 사람들 없는곳이 최고다~.

 

보성의 대운사를 향하던 차를 돌린 우리는 정반대로 이번엔 북쪽을 향해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지방의 국도보다는 차라리 전주시내에 위치한 한옥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순전히 어디로가야 차가 안막힐까를 고민하다 나온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번째로 찾은 전주의 한옥마을은 다행히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활기 넘치는 사람들의 인파, 예쁘게 가꿔놓은 튤립꽃밭, 아기자기한 기념품 소품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관람했던 전북대 태권도 시범단,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에, 독특한 건축양식에 유서깊은 전동성당까지.

 

 

가장 먼저 들른곳은 한옥마을 입구에 위치한 경기전. 조선의 태조 이성계 어진을 모신 곳이다. 우리에겐 '왕자의 난'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이방원, 즉 태종이 아버지를 기리고자 전주와 경주, 평양에 각각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전각을 세웠는데, 이곳 전주는 이성계, 이방원이 전주 이씨라서 왕조의 근원지라 하여 선정되었다고 한다. 왜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이 중건했다고. 경기전 경내에 들어가서 길을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 가봤다. 바로 어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었다.

 

 

실제 어진은 처음 보지만 왠지 낯익다.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나 훗날 역사소설등의 역사책에서 종종 인용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인자한 할아버지이자 평범한 얼굴이다. 이런 분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겁에 질려했을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잠시 조선 개국당시의 역사이야기를 해보자.

 

당시 국제정세(중국 대륙)는 오랜기간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족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이 중심이된 명나라가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에 원나라는 속국이었던 고려의 도움을 받아 명나라를 견제하려 하였고, 명의 주원장은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끊으려 고려를 위협했다. 이때 고려의 왕이었던 우왕은 어느 한쪽의 편에 서지않고 등거리 외교로 임하였는데, 원나라와 명나라가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사이에 무주공산이던 요동지역을 정벌하고자 대군을 파병하게 되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정시켰는데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러 조민수와 이성계등이 진격을 멈추고 우왕에게 '4대불가론'을 제시하며 회군을 청하게 된다. 4대 불가론은 첫째, 작은나라(고려)가 큰나라(명)를 거스르는건 옳지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부적절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수 있고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오는 여름에는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수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리저리 갖다대지만 결국은 출정할수 없다는 말이다. 우왕이 끝내 회군을 명하지 않고, 출정을 주장하자 마침내 말머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킨다. 당시의 군권이 조민수와 이성계에 있었기에 우왕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폐위되고 말았다. 이성계의 편에 서지 않았던 최영은 이성계에게 살해되었고, 우왕 대신 세웠던 창왕도 우왕과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성계가 내세웠던 우왕의 폐위 명목은 왕이 선왕이었던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후에 스스로 왕이 되고, 명나라에 사대관계를 청하였다.

 

여기서 재밌지만 씁쓸한 사실 하나~ 조선이라는 국명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아시는가? 명나라에 사대관계를 자청한 이성계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함과 동시에 새 국호를 '화령', '조선' 두개를 지어보낸 다음 명나라가 선택해준 '조선'이란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시작부터 사대주의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요즘말로 '뼛속까지 친명주의' 왕이었다.

 

 

 

경기전 앞마당엔 이렇게 예쁜 꽃밭을 임시로 만들어놨다. 꽃마차를 타고 운전하는 주원이와 주하. 안그래도 똑같이 생겼다고 쌍둥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데, 거기다 더해 옷까지, 아니 머리모양까지 트윈룩을 완성시킨 마눌님~

 

 

 


경기전 내원에 있는 대숲에서 또 영화를 찍고있다... ㅡㅡ;

 

경기전을 나서자 앞마당에서는 전북대학교 태권도부인지 동아린지에서 시범을 시작하는데 절도있는 동작과 기합소리, 그리고 격파시범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줄 몰랐다. 일요일이라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사람들을 따라 슬금슬금 걸어가다보면 수많은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에서 팔고있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느라 또 시간가는줄 모른다.

 

 

 

 

 

등만들기 체험도 해보고,

 

 

(사실 저 등만들기 체험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속았다. 만들어서 가져가는줄 알았는데 놔두고 가란다. 땡볕에서 삼십여분간 땀 뻘뻘 흘러가며, 손에 풀 묻혀가면서 기껏 만들어놨는데.. ㅡㅡ;)

 

카페에서 키우는 개랑 놀기도 하고,

 

 

품종은 아마도 중국 황실에서 키웠다는 차우차우가 아닌가 싶다. 갑자기 나타난 저 개 때문에 일대 사람들이 모두 카메라를 꺼내드는 일대 혼란이~ 아쉽게도 어찌나 나돌아 다니는지 정면 얼굴을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익숙한듯 짖거나, 위협하거나, 무서워하지도 않고 혼자서 삘삘거리고 여기저기 왔다갔다만 하더라~

 

이 날은 일요일, 친구네와 나들이 간다고 주일 미사도 빠뜨린 참이었다. 그런데 용케도 관광하기 위해 찾은 유서깊은 전동성당에서 마침 미사가 시작되길래 미사를 드리게 됐다. 일석이조~ ^^

 

 

전주의 전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내부공사를 맡았던 프랑스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고,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1908년 건축을 시작하여 1914년에 외곽공사가 끝났다. 벽돌 한장 한장이 모두 직접 구워서 만들어 썼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권상연이 처형당했던 처형장 인근의 성곽돌을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모든 공사가 끝나고 성당이 완공된 것은 1931년이니, 착공한지 23년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명동성당과도 상당히 닮은 성당이다.

 

 

하루종일 신나게 강아지마냥 뛰어놀던 두 딸아이들은 경건하고, 엄숙한 미사 분위기에 바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엄마, 아빠가 미사 드리고 있는 도중에 아주 누워서 쿨쿨~ 애들아, 여기 너네 침대 아니거든?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서자 밖은 어둑어둑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그 많던 인파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낮시간에는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슬슬 정신이 돌아오고 가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니, 한옥마을을 특징할만한 문화체험이나, 전통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행사들은 별로 없고, 오직 장사하는 가게들과 노점상들만 눈에 띄는 점이 아쉽다. 또한 이렇게나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대형 주차장이 없이 소규모 주차장만 5~6곳에 분산시켜 놓다보니 주차할 곳을 찾지못해 뱅뱅 돌거나, 영업하는 가게 앞에 부득이하게 주차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점들은 시정됐으면 좋겠다. 끝으로 어딜가나 귀여움과 시크함의 끝을 보여주는 우리 작은딸, 주하의 강력한 사진 두장을 소개한다.

 

주하야~ 여기봐. 사진 찍게. 했더니 카메라를 보고 과하게 잡아주는 포즈. ㅡㅡ;

 

 

그리고 이어지는 썩소. 내 시크함을 따라올자 누구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