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성작가들의 작품 편향성에 대해 지적한 바가 있다. 그건 다름아니라 작품의 소재가 천편일률적으로 '성'을 다루고 있다는 거였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입에 담는것조차 금기시됐던 '성'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작가로서 용기와, 실력을 인정받는것인양, 이 시대 여성작가로서의 사명감이라도 되는양, 너도 나도 여성작가들은 작품에서 성과 섹스에 탐닉했다. 때론 선정적인 글로, 때론 성차별에 대한 풍자로, 때론 당당하게 성을 즐기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며 그렇게 작품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다 그런건 아니었지만 여성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다보면 열권중 6~7권은 그렇게 성을 다루는 작품들이었다. 간혹 박완서, 공지영처럼 사회성 깊은 글을 쓴다거나 사람사는 따뜻한 작품을 남기는 작가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남성 작가들에 비해 소재의 폭이 좁다고 느꼈다. 그런데 왠걸? 이번에 읽은 소설 '앤'은 이런 여성작가에 대한 내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중에 이재익이 있다. 많은 분들이 알겠지만 라디오 피디면서도 활발하게 글을 써서 한 해에도 두세권의 신작들을 발간하는 인기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문학적인 평가는 떨어질망정 대중들이 원하는 '재미'의 코드를 잘 활용해서 글을 쓸 뿐 아니라 시사성 짙은 작품,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까지도 재미를 잃지않고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소설 '앤'을 읽으면서도 일전에 이재익표 소설을 읽는것마냥 대중적인 '재미'를 느꼈다. 책을 읽기전 대략 이 책이 스물여섯살 앳된 여성작가의 글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페이지를 넘길수록 새삼 놀라워서 표지의 작가 사진을 여러번 돌아보게 됐다.
작가 전아리. 1986년생. 현재 연세대 철학과에 재학중인 대학생이다. 중고교 시절부터 문학성을 겸비한 작품으로 여러 문학상들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08년 <직녀의 일기장>으로 제2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009년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로 제3회 디지털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즐거운 장난>, <시계탑>, <팬이야>, <김종욱 찾기>등이 있다. 김종욱 찾기? 영화와 뮤지컬로 성공한 그 유명한 작품을 전아리가 썼단 말야? 했는데 잠시 검색해보니 원작자는 장유정이고 전아리는 뮤지컬 작품을 소설화 했다고 한다.
잠깐 작품 소개를 해보자.
'나'라는 일인칭 화법을 쓰고있다. 그런데 '나'는 남자다. 영화 <친구>처럼 바닷가 항구 도시를배경으로 깨복쟁이 친구들처럼 몰려다니던 나, 기완, 진철, 재문, 유성 다섯친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정과 의리, 진짜 친구라는 이름속에 가려진 이기주의, 탐욕, 가식이 조금씩,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슬며시 얼굴을 들이내민다. 그리고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의 가운데는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여학생 앤과 신주홍이 있다. 작품은 스케일이 크지도, 대단한 문장력을 갖고있지도않지만 오밀조밀한 반전의 장치와 심리게임을 적절히 삽입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까?왜 그랬을까? 를 쉴새없이 추측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한번씩 과감한 성애표현이랄지 사춘기 소년들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시한번 저자가 앳된 여대생이 맞는지 확인하러 작가 사진을 돌아보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멋지게 엔딩을 마무리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는 점. 그게 실수였든지, 의도된 작가의 장치였는지는 알수없지만 왠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긴다.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반전, 어? 그럼 애가 범인인거야? 그런데 왜? 이런 의문에 속시원한 설명을 주진 않지만 마치 작가가 이렇게 얘기하는것 같다. "왜냐고? 다시한번 천천히 작품을 읽어봐. 내가 얘기해줬는데 그걸 이해못하고 왜냐고 묻는거야 지금?" 그런데... 설령 그렇게 얘기한다 하더라도 머리 나쁜 나는 물어봐야겠다. 왜냐고.. 그러니까 이 친구들이 어쩌다 이렇게 된거냐고..
천편일률적으로 사랑과 섹스만 써대던 여성작가들 사이에서 전아리는 참신하고, 세련된,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여성작가로 인식되어질 것이다. 기존 작품들 중에서도 <팬이야>도 팬층이두터운 작품이라고 하니 다음번엔 이 책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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