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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한 가족이야기 '그녀의 정의'

이 소설은 일면 '추악한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1976년~1983년 사이의 아르헨티나 내전과,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어느날 평화로운 저녁시간에 아빠, 엄마, 오빠와 여동생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던중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이 오빠를 잡아가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이즈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공포통치의 한 단면이다. 정부에 조금이라도

저항하거나,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무작정 잡아가서 고문, 폭행, 살해했고, 주위에서 소리

소문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때였다. 오빠는 이런 독재정권맞서 교내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노동자 단체와 연합으로 집회를 갖고 있었기에 항상 가족들은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소설 <그녀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당시의

아르헨티나의 정세를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 어느곳이나 후진적인 사회에서는 군부가

득세한다. 당시의 아르헨티나가 그러했고,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한국이 그러했다.

1946년 후안 도밍고 페론 장군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된다. 페론 장군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노동자와 서민들의 권익 보호에 관심을 보였다.

페론 장군의 이같은 정책 뒤에는 부인 에바 페론이 있었다. 오늘날 연극, 뮤지컬 '에비타'로

너무나 유명한 에바 페론은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도시 빈민으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누구보다 서민의 애환을 잘 알던 에바 페론은

남편을 통해 친서민정책을 편 탓에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됐다.


(에바 페론(에비타)의 무덤. 지금도 이곳엔 생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고, 지속되면 썩는 법,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점점

페론 정부는 독재의 길을 걷게 되는데, 독일의 히틀러를 본따 '페론 주의'를 만들어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한 후 정부 요직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부패와 사치스런 생활

을 하게된다. 거기다 페론 부부의 우상화 작업까지 병행됐으니 마치 주체사상을 정립하고,

우상화 작업을 진행한 같은 시대의 북한의 모습과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에 경제가 파탄나고, 물가가 치솟아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그 기회를 틈타 1955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페론 정부를 축출한다. 하지만 확고한 세력을 구축했던 후안 페론 장군은 스페인

에 망명했다가, 권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절치부심하다 1973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다시

권을 잡았으나, 1년만에 사망하고 만다. 당시 셋째부인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에 있었기에

다음 대통령으로 이사벨 페론이 등극하지만 국가를 잘 통치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시위와

테러에 극심한 혼란을 겪게됐다. 이때 반군의 활동이 격해졌는데 국민들은 힘있고, 안정된 지도자

를 원했기에 자연스레 이사벨이 퇴진하고 군부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정권을 잡게됐다.

아르헨티나 비극의 시작인 셈이다.


1976년 취임한 비델라 장군은 정국안정을 빌미로 각종 시위나 반정부 활동하는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대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이 조금이라도 시국에 관심을 가지면 납치되거나,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일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전국의 감옥이 가득찼고, 아르헨티나

는 공포통치에 숨조차 쉬지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소설은 여동생 실비아와 오빠 에두아르도가 서로에게 편지를 쓴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 편지는 실제로 부쳐지지도 못했고, 두 남매 모두 부치지 못할걸 알고있다.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는 두 남매의 입을 빌어 독자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는 작가의 편지인 셈이다.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다 끌려가 갖은 고문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서는 죽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빠 에두아르도와, 아무리 민주화가 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한들 나 한몸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그저 조용히, 이럴때일수록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바램을 서로

대척되는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것일까. 하루라도 아들이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두려움에 휩싸여 사는 의사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이해

할지 못하고,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아들.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아들이 잡혀가서 감금당하고,

고문받으며 생과 사를 넘나들게 되자 자연스레 해소된다. 아들은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군사정권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고문에 못이겨 그토록 증오하던 조직의 배신자들처럼

알고있는 모든것을 실토하려던 순간 부모님 생각이 나, 자기의 짧았던 객기를 후회하게 되고,

용기없는 소시민이었던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반정부 세력들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으니 이로써 이들의 갈등은 눈녹듯이 해결됐음을

독자들은 눈치채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그렇다면 왜 책 제목은 <그녀의 정의> 이고, 표지는

늘씬한 여성의 다리를 보여준단 말인가. 그렇다. 사실 주인공은 오빠 에두아르도와 여동생

실비아다. 뜨거운 남매애를 가진 이 두 남매는 오빠가 잡혀가자 오빠를 살리기 위해 실비아가

목숨을 걸고 무모한 시도를 하게되는데 이 대목이 눈여겨 볼만하다.


그전까지, 오빠가 군인들에게 잡혀가기 전까지만 해도, 실비아에게 작금의 국내정치 현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또래 친구들과 수다떨고, 카페에서 차 마시고, 영화보고, 클럽에 가서

춤추고, 남자친구 만나는게 일상이었다. 같은 시기 한 가정의 가장이, 금쪽같은 아들, 딸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잡혀가고, 고문받고, 실종되고, 죽어 나갔지만 실비아에겐 남의 일일 뿐이었다.

마치 한국 사회의 젊은층을 보는듯 하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 투표에 대한 무관심, 누가 되도

다 그놈이 그놈이라며 아는척하는 냉소주의, 나 하나 떠든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주의.

그런데 오빠가 잡혀가 죽게될지도 모르게 되자 실비아는 오빠를 위해 무슨일을 할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정치와 시국에 눈을 뜨게된다.



 새장에 갇힌 새들을 직접 보니 불쌍해 보였어. 그래서 물어 보았어.

 "왜 이 많은 새들을 다 새장에 넣어놓은 거야?"

 "관찰하기 편하잖아. 내땅에서 잡은 놈들인데 내 마음대로 하면 안돼? 어쨋든 이 녀석들도

 야생에 있는것보다 여기 있는게 더 나을거야. 아무것도 안해도 밥은 먹여주니까. 게다가

 새장안에만 있으면 위험하지도 않고. 다 애들을 위해서 이러는거야."

 노베르토의 말을 가만히 되새게 보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어.

 "위험하다고 해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걸 훨씬 좋아할거야"

 노베르토가 다시 맞받아쳤어.

 "자유롭기는 뭐가 자유로워! 애들이 자유에 대해서 알기는 하겠어? 애들은 새일 뿐이야.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자유가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대."

 그 말에 그만 나도모르게 욱해서 물어봤어.

 "한 나라가 자유를 빼앗겼다면 어떻겠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면, 질서를 위해서 부분적으로 자유가 억제될 때도 있어"

 소름끼치는 말이었어...

자, 리뷰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 마무리 하자.

책을 읽다보면 이 시대의 아르헨티나 정국과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두환 시대가 오버랩 된다.

우리도 똑같은 시대를 지나왔다. 정부에 협조적이지 않거나,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남산에서 고문을 당했다. 배후를 대라거나, 동료의

이름을 대라고. 그러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집에 돌아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용히

사라져 실종자가 되버렸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고, 독재정권과 싸워 그들을 몰아내고 오늘날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두 독재자들은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거나,

유죄를 선고받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먼 옛날이야기라고, 20년도 넘은 과거라고 하기엔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디에 서있는지 의아하기 짝이없다. 과연 지금은 확고한 민주주의가 정립

되어, 언론이나 국민들이 마음대로 정부를 비판하고, 자기 생각을 떳떳하게 외칠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어떡해야 할것인가? 목숨을 내놓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야 하는걸까? 그럴 필요없다. 그저 투표장에 나가 표로서 심판하면 된다. 나 하나 쯤이야~

하는 생각을 버리고 말이다.


그녀의 정의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글로리아 웰런(Gloria Whelan) / 범경화역
출판 : 내인생의책 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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