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구에 미치다

이영수의 2군행? 이해할수 없다

6월5일자로 포수 김상훈이 1군에 들어오고 이영수가 2군으로 내려갔다.

김상훈이야 부상에서 회복되서 1군에 올라오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따라 말소되는 선수가 왜

이영수인가? 같은 포수 포지션인 이성우가 내려가는게 당연하고, 포수를 3명씩 유지하겠다면 최근

부진한 김형철이 내려가야 마땅하다. 김형철이 내려가면 3루수가 없다고? 웃기는 소리.

김상현, 박기남, 이현곤이 없는 지금 기아의 3루자리는 무주공산이다. 김형철과 홍제호가 번갈아가며

출장하고 있지만 기록으로 보면 두 선수 모두 3루를 꽤차기는 어려워보인다. 싹쓸이 3타점 2루타로

깊은 인상을 남긴 홍제호가 타격에서 김형철을 앞선듯 했지만 타격자세라든지 타구의 질이 좋지못해

1군수준은 아니었다. 김형철은 아예 논할 필요도 없어보이고..그렇다면 3루자리엔 이영수가 있다.

최근에는 외야수로 나서고있지만 원래 3루를 봤던 선수이니 타격이 안되는 김형철, 홍제호보다는

이영수에게 3루를 맡기고 꾸준히 출장기회를 주는게 가장 합리적인 안이 아닌가.

최용규도 있다. 1군에서의 활약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차라리 최용규가 지금의 김형철, 홍제호보다는

한단계 위로 보인다.

그런데 여전히 최용규는 2군에 묶어두고 있고, 이번에 이영수까지 2군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조범현감독의 눈엔 이들보다 여전히 자신이 데려온 김형철이 낫다고 보는것일까?

그런 확신이 있다면 팬들의 욕을 들어도 꾸준히 김형철을 3루 붙박이로 고용해서 기회를 줘보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수기용 정말 지겹다.

 

(부진한 기아타선의 활력소가 될거라 생각했던 이영수.

기회를 잡는것이 이렇게도 어려운일인가?) 

 

1군에 올라왔다 쏠쏠한 활약을 보였음에도 이번에 2군으로 내려간 이영수의 기록을 살펴보자.

2004년 기아에 입단했다. 원래 대구상고를 졸업하던 1999년 해태의 지명을 받았지만 해태라는 팀에

입단하기 싫어 대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직접 했던 말을 빌리자면 당시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쌍방울, 해태 입단만은 피해야한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경상도 출신이던 선수들 사이에서 지역

적인 탓도 있겠지만 시기적으로 IMF때라 그만큼 연봉이 짠구단이 인기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결국 한양대를 졸업하던 2004년 해태에서 기아로 이름이 바뀐 팀으로 입단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입단첫해 1군에선 한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줄곧 2군에 머문다.

재능은 있었지만 같은해 입단한 대형3루수 광주 동성고의 김주형에 밀린탓이다.

같은해 계약금 2천만원을 받고 입단한 선수가 계약금 3억원에 2차 1지명으로 입단한 선수보다 더

기회를 잡을수 없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

2004년 2군에서 68경기에 나가 2할5푼을 쳤다. 그리고 2005년에는 3할1푼3리로 2군 남부리그 타격

3위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1군의 문은 좁았다. 고작 4타석에 들어서 2타수 무안타.

기회를 주지않은 팀에 서운한 감정이 든 그는 시즌이 끝나고 입대를 결심해 상무에 입단한다.

나이가 25세였다. 여기서도 못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악을 품었다고 한다. 상무 입단 첫시즌인

2006년 그는 64경기에서 0.401를 기록하고 북부리그 타격왕에 오른다.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

프로야구 1군경기에서 4할이상을 친 선수는 프로원년인 1982년 백인천의 0.412가 유일하다.

앞으로도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도 알려져있지만 이도 72경기에서의 기록이다. 

1, 2군을 통틀어 4할타자는 역대 4명뿐이라고 하니 비록 2군일지라도 얼마나 큰 대기록인지 알수

있다. 그런데 연말에 열린 KBO 시상식때 그는 불참하려 했다고 한다. 대기록임에도 2군선수들의

기록을 인정해주지 않는 시선에 괜히 군복입고 참석한 시상식에서 수모만 당할거라고 생각했단다.

그가 2군리그 타격왕을 하던 비슷한 시기에 2군 타격왕 출신들은 현재 1군에서 팀의 주축선수로

자리를 잡았다.

2004년, 2005년 북부리그 타격왕인 SK의 박정권, 2004년 남부리그 타격왕인 삼성의 박석민 

그런데 2006년 남부리그 타격왕인 기아의 이영수는 2010년 여전히 2군선수일 뿐이다.

상무에서 제대한 2008년 그는 기회가 올줄 알았다. 그러나 조범현감독하의 기아라는 팀에서는

여전히 2군선수일 뿐이었다. 그나마 입대전 2005년 1군에서 4경기에서 2타수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2군리그 타격왕을 하고 제대한 2008년에는 15경기에서 32타수의 기회가 주어진걸 감사해야 할까?

2009년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검색해봤지만 2009년에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군 제대후 그는 수비 포지션을 3루에서 외야수로 바꿔 훈련하기 시작했다. 기아의 3루에는 김상현

이라는 새로운 선수가 태산처럼 버티고 있었고 곧 제대하는 유망주 김주형과 백업내야수 박기남이

있어 3루수로 자리잡기 힘들다고 판단한 코칭스탭과 본인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2010시즌 예상대로

이종범, 김원섭등 주전 외야수들의 부진으로 외야에 기회가 왔고 그는 11경기에 나와 19타수 6안타

0.316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뜻밖에 3루에 구멍이 뚫렸다. 어느 누구하나 3루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나는 당연히 이영수를 생각했다. 더군다나 모처럼 1군에서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꾸준한

출장기회만 보장된다면 올해 서른이라는 나이에 늦게나마 주전으로 도약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6월5일자로 1군에서 말소된 것이다.

한때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않는 구단에 섭섭한 생각이 들어 '내가 경상도 출신이라 그러는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감독도 경상도고 타격코치도 경상도 출신

이었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영수는 오늘도 묵묵히 땀만 흘릴뿐이다.

그의 나이 올해 서른. 이제 더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기아타이거즈는

아까운 천재 하나를 잃게 될것이다)

 

얼마전 포스팅을 통해 모든 2군선수들에게 격려의 글을 남긴바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꾸준히 열심히 준비하다보면 언젠가 기회는 반드시 오게 마련이고, 갑자기 찾아온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수 있다는 '상식적인 얘기'였다.

이영수의 경우를 보자면 그 '상식적인 얘기'가 기아에서는, 조범현감독하의 기아에서는 더이상 통용

되지 않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