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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공녀들의 이야기 '화려한 경계'

 

조선 초기 명나라 황실에 후궁이나 궁녀로 보내졌던 사대부가 여인들의 한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흔히 공녀라고 하면 고려말기 원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을 생각하기 쉬우나, 여자를 공물로 바치던 역사는 그 이름만 달리하여 조선조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고려때는 서민들 위주였다면 조선초기에는 명나라 황실에 후궁으로 바쳐질 사대부가의 여식들이 그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미모가 뛰어나다거나, 조정의 학식있는 집안의 여식들이 몸종들과 함께 수십에서 수백명씩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졌는데,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되는 것이니 집안에서는 경사로 취급됐으나 정작 고국을 떠나 끌려가다시피하는 여인들 개인적으로는 한이 서린 일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세종과 세조때 조정의 세를 형성했던 양절공 한 확의 누이들인 한규란, 한계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소설이다보니 스토리의 곁가지는 허구이긴 하나 등장인물이나 뼈대를 이루는 중심은 실제 역사에서 기록되는 실화다. 특이하게도 자매가 모두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사례가 바로 한규란, 한계란인데 한규란은 명의 태종 영락제의 후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죽은후 여비에 올라 실질적인 황후의 대우를 받는 자리까지 오른다. 한규란의 친동생인 한계란은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의 후궁이 되는데 소의에 봉해졌다. 두명의 누이가 황비가 되면서 한 확은 조정에서 승승장구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며, 훗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고 정권을 찬탈할때 적극 협력하여 공신이 됐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조의 충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는 골육상잔의 비극을 지켜봐야 했고, 그렇게 왕위에 오른 셋째아들 이방원도 증손인 단종대에 이르러 수양대군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등 비운의 왕가였듯, 중국의 명나라도 조선과 비슷한 왕족의 운명을 겪고 있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죽고, 그의 손자 건문제가 즉위하자 주원장의 넷째아들이었던 주체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영락제에 오른다. 그리고 주변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말, 비단, 금등의 공물과 함께 여자들도 진헌녀란 이름으로 바치게 된다. 자고로 힘없는 나라에서 고통받는 쪽은 여자와 어린이들이었으니 아프리카 원시부족들도 서로간에 전투가 끝나면 승리한 부족이 패배한 부족의 여자들을 데려갔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나면 빠지지 않는것이 패망한 쪽의 여자를 겁탈하고, 잡아가는 역사의 반복 아니었는가. 그런 면에서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울때 내세운 명분이 백성을 조공으로 바치는 힘없고, 부패한 나라를 일신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조선 역시 사대부가의 여식들을 조공으로 바칠수 밖에 없었다.

 

 

소설은 대단히 흥미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인칭으로 '나'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각 장의 '나'가 모두 다른 인물들이다. 목차에서 보여지듯 '나'는 장치자였다가, 기림이었다가, 한계란이 되고, 권소옥이 된다. 각각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지만 이 모든 인물들은 서로간에 연결이 된다. 그리고 크게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황제의 사후 무덤에 함께 순장되는 비극을 맞는 한규란과 선덕제의 후궁이 된 한계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고려조때의 공녀들에 비해 신분이 상승되고,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 낯선땅에 궁인으로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한이 서린 이야기들이라 가슴 한켠이 뭉클해진다. 소설적 재미로도 훌륭하지만 모두 실재 인물인데다가 한 확, 한규란, 한계란 일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찾아보는 재미도 가지고 있다.

 

부친 지순창군사 한영정때까지만 해도 가세가 기울어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한규란이 황비가 되자 남동생 한확이 조정의 중책을 맡아 출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동생인 한계란 마저 황비에 오르자 더이상 바랄것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세종때 이조판서,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단종때 좌찬성을 지내다 수양대군 편에 섰고 이후 세조때 좌의정 자리까지 올랐다. 딸 한여진이 수양대군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세자빈이 됐고, 세자가 요절한후 궁에서 쫒겨났다가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면서 다시 화려하게 궁에 복귀하는데 이 여인이 바로 인수대비 되겠다. 당시 명나라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었던 한계란과 인수대비 한여진은 고모와 조카의 관계가 된다. 훗날 인수대비는 아들 성종의 세번째 왕후였던 윤씨를 폐위시키고 사약을 내리는데 폐비 윤씨의 아들이 연산군이고, 훗날 왕위에 올랐을때 할머니를 원망하며 궁에 피바람을 일으키게 되는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알고있는 역사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이기도 했고.

 

이처럼 우리 역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료를 찾고, 읽어나가다 보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져들게 한다. 소설속 한계란이 그토록 강조하던 말.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아마 이 말은 책속에서 오빠에게, 조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끄러운 과거를 잊지말아라. 잊고싶은 역사일지라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라고 말이다. 오늘날 정치계에서도 더이상 과거에 얽메어 분열하고, 주저앉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하자는 정치세력이 있다. 흔히 친일파로 상징되는 보수 정당과 언론들이 이처럼 미래를 내세우고 있지만, 과연 제대로된 역사인식과 과거사 정리 없이 밝은 미래가 가능한 것일까? 일제시대 조국을 배신하고 친일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들, 유신정권 시절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고통을 줬던 이들, 군사정권 시절 정경유착과 언론탄압을 통해 권세를 누렸던 이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더이상 과거를 들추지 말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자고 한다. 이들에게 이 책을 꼭 보여주고 싶다.

 

 

 

화려한 경계
국내도서>소설
저자 : 조정현
출판 : 도모북스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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