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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여성작가들이 쓴 섹스에 관한 단편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내가 책에 관한 리뷰글을 남기면서 수차에 걸쳐 적었던 글이 있다. 한국 문학계에서 여성작가들이 쓰는 글의 소재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는 것. 바로 성과 섹스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일본 책들의 번역서 출간이 잦아지면서 이런 점은 더욱 부각되어 보이는데 최근들어 블로거들의 다양한 소재들이 출판으로 이어지고 있고, 번역서들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주제와 소재의 글들이 차츰 늘어나는 반면 여성작가들은 아직 '섹스'라는 화두를 못벗어나고 있는듯 보인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성과 섹스에서 항상 소극적이고 함부러 입에 담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온 여성작가들이 나름 선구자적 입장에서 터부시되어 오던 소재에 대해 과감한 표현으로 금기를 깨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더이상 성에 대해 쫄지 않겠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성을 즐기고, 입에 담을 권리가 있다! 뭐 이런 의도 아닐까? 하지만 너도 나도 여성작가들이 그런 생각으로 글을 써대니 첨엔 참 용기있다고 달리 보이다가도 오히려 이젠 식상하다...

  

 


  

지금 소개하는 책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역시 여성작가들이 쓴 섹스에 관한 단편들이다. 책의 표지 문구는 참 화려하다. '여성작가들의 아주 은밀한 섹스판타지', '쿨하게,당당하게,자신있게!', '여성작가들이 거침없이 써내려간 에로판타지아', '허무한 인생속, 그래도 살맛나게 하는 섹스의 향연', '6명의 여자들이 펼치는 성에 관한 대담하고 센시티브한 수다' 하지만 이런 문구들이 오히려 저급하게 느껴지고 이 책에 소개된 단편소설들의 질을 떨어뜨리는듯 하다. 편집부의 오버가 아닐까.. 여성작가들의 한계(?)를 비평하는건 여기까지 하고, 소설을 살펴보자.

 

낯익은 이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여섯명의 여성작가들의 단편집인데 구경미, 김이설, 김이은, 은미희, 이평재, 한유주의 작품들이 실려있다. 아하~ 바로 엊그제 <여신과의 산책>이란 단편집을 읽었는데 여기에도 김이설과 한유주의 작품이 있었다. 불과 이삼일만에 우연하게도 김이설과 한유주의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여신과의 산책>은 인터파크 웹진에서 네티즌들의 좋은평을 받았던 작품들을 모아 출간한 단편소설집이고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는 여성작가들의 섹스에 관한 단편들을 모아 만든 책인데 이 두 작가가 그만큼 지금 활발한 활동을 펴고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섹스를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점만 놓고 보면 여섯편의 단편들이 각기 개성있는 필력을 보여주며 꽤나 읽는 재미를 준다. 역시 여성작가들이 표현하는 노골적인 성의 수위가 남성작가들보다 한수 위다. 그러면서도 육체적인 쾌락만을 탐미하는 문장이 아니라 보다 감성적인 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예전 사춘기때 탐미했던 16mm에로영화에서도 가끔 여성감독이 연출한 빨간비디오가 출시되곤 했었는데 그때도 역시 육체적인 에로만 추구하던 남성감독들과 달리 여성감독의 에로영화가 훨씬 야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영화뿐 아니라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독 한유주의 작품이 눈에 띈다. 긍정적으로? 아니 부정적으로...

 

한유주는 엊그제 읽었던 <여신과의 산책> 단편집에서 '나무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있네'라는 제목의 작품을 내놨었다. 언젠가 기억나지도 않을 예전 언젠가 한 외국작가가 쓴 어떤 글에서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상관없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문장들을 이어갔던 글이 생각나게 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말도안되는 되도않는 글을 멋을 부려 써놓았다고 밖에. 하지만 그 글이 산울림의 노래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소설이라고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제목따위는 생각나지 않아'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건 또 어쩔건데... 이렇게 글을 써놓으면 평단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한테는 참 좋은 평을 들을것 같다. 좀 심오해 보이고, 뭔가 있어보이고, 세속적이지 않아 보여서. 하지만 나처럼 단순한 독자들에게는 욕을 바가지로 퍼들을 소설이다. 도대체가 뭘 말하고 있는건지조차 알수가 없다. 작가 소개란에서 "텍스트의 경계를 실험하는 문학동인 활동을 하고있다"라고 하더니 이 작품 역시 그런 실험정신에 입각해 쓴 소설이라고 봐야겠다. 부디 텍스트의 경계를 명확히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이설의 소설 '세트 플레이'는 인상적이지만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철저하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글을 쓴 탓이다. 간혹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유부녀들의 일탈과 미성년자들의 성범죄가 지저분하게 묘사되고 있다. 충분히 있을수 있는 픽션이지만 씁쓸한 뒷골목의 일상이다. 처음부터 작가의 길이 아닌 화가로 먼저 예술활동을 시작했다는 작가 이평재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작가의 이력을 보여주듯 다소 투박한 문장이지만 예술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김이은 작가는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에 기록된 사건을 바탕으로 역사 픽션소설의 대가 이수광 작가의 도움을 얻어 사극 형태의 단편을 소개했다 '어쩔까나' 독특한 아이디어이고 해학이 묻어난다. 평범하지 않아 좋다. 이 밖에 구경미의 '팔월의 눈' 과 은미희의 '통증'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활발하게 활동중인 여성작가. 앞으로 십년이상 자주 이름을 보게될 대표 여성작가들의 필력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양장)
국내도서>소설
저자 : 구경미,김이설,김이은,이평재,은미희
출판 : 문학사상사 201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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