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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근대화시기 잘 알려져있지 않던 우리네 모습 '이토록 아찔한 경성'

 


OBS에서 2년에 걸쳐 100회 남짓 방송했던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MBC FM라디오에서 일요일 오전 8시경 <타박타박 세계사>란 프로를 진행하여 친숙해진 사회학자이자 역사가 남경태가 진행을 맡았던 프로그램이다. 이 중 특히 조선말기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는 근대화 시기 우리나라의 사회를 다룬 부분들을 발췌해 책임 프로듀서였던 한성환 피디가 김병희, 김인회, 이수광, 이영미, 이충렬, 최영묵등의 교수와 작가들과 함께 책을 펴냈다. 얼핏 책 제목만 놓고 봤을때는 '근대 조선인들의 욕망과 사생활'이라는 부제 때문에 살짝 야릇(?)한 내용이 있을거라 기대(!)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야릇함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건전한 교양서적이었다. ㅡㅡ;


여섯가지 테마를 놓고, 19세기 말기에서 20세기 중기까지 조선의 사회상을 들여다 보고있다.





첫번째는 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두번째는 대중음악으로 본 근대의 풍경, 세번째는 사법제도로 본 근대의 풍경, 네번째는 문화재로 본 근대의 풍경, 다섯번째는 미디어로 본 근대의 풍경, 마지막 여섯번째는 철도로 본 근대의 풍경이다. 개인적으로 난 참 역사를 좋아한다. 아직 세계사까지는 섭렵치 못했으나 한국사 분야는 일종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늘 부족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시기가 구한말이라 칭하는 조선후기부터 일제시대, 광복까지의 기간이었다. 삼국시대, 고조선, 심지어 단군 할아버지가 등장하던 옛 역사와 신화는 초등학교때부터 무한반복 학습을 해왔으나 이상하게 조선후기 이후부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전반에 걸친 자세한 사료도, 설명도, 또 그 시기를 다룬 소설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그 시기에 대해 갈증을 느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학자, 사학계의 주류이자 뼈대를 이루는 것이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함께 조선시대를 다룬 조선왕조실록등을 근거로 하고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러한 공신력(?)있는 사서가 다루고 있는 기간에는 활발한 연구와 고증이 가능한데 반해 조선왕조실록이 전하고 있는 역사 그 이후를 다룬 사서가 없기 때문에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의 역사연구가 침체되어 있는건 아닐까? 혹은 일제시대 사회상에 대한 시각이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측과 뉴라이트를 비롯한 친일보수 세력이 주축이 된 측이 서로 엇갈린 시각을 가지고 있어 통일된 역사적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욱 이 책 <이토록 아찔한 경성>에서 다루고있는 그 시기의 사회상이 관심을 끌고, 흥미를 유발하게 됐다. 아래 광고를 봐보자.





책 속에 흥미로운 부분중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는 1886년 2월 22일에 실린 '덕상 세창양행 고백'이라는 광고였다고 한다. 그 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광고는 전성시대를 이룬다. 최초의 광고 세창양행 광고내용은 아래와 같다.

"쇠가죽, 호랑이가죽, 사람 머리털, 호랑이 발톱은 사들이고 자명종 시계, 뮤직박스, 성냥은 판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9월 7일에는 동아일보에 다소 선정적인 광고도 실렸다. 일명 '빨간책'이라고 불리우는 포르노그라피 광고다. "말 못할 즐거움, 진본 여덟권을 단지 1엔에 산다"라는 헤드라인 옆으로 8권의 선정적인 책 제목들이 나열돼 있다. 짧은 한자 실력으로 전부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그중 몇권의 제목들이 '남녀 미인법', '여자의 비밀', '남녀의 밀서' 등등이다.





일제시대때는 근대적인 사법시스템이 도입된 시기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판사, 검사, 변호사로 재판이 이루어지는 근대적인 제도가 도입됐는데, 실제로는 판사가 턱없이 부족하여 검사가 판사의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는 또 검사 역시 부족하다보니 경찰이 검사 역할까지 하던때가 있었다.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사가 기소를 하면, 판사 앞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법리싸움을 벌이고 최종적으로 판사가 선고를 해야하는데 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경찰이 수사권, 심판권, 집행권까지 행사를 했던 것이다. 그 시기 경찰이 뭐였는가. 순사라고 불리는 일본 경찰이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고, 피지배민족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순사가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수사과정에서의 고문등 반인권적인 수사기법도 합법적으로 조선에서는 인정됐다. 또한 '범죄즉결례'라는 것을 만들어 3개월 이하의 형이 예상될때는 경찰이 즉결처분 할수 있게 용인했으며, 1912년에는 '조선태형령' 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체벌을 가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때 전근대적인 형벌이라고 해서 태형이 없어졌다. 위 그림은 화가 김윤보가 태형을 맞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다.

'문화재로 본 근대의 풍경' 섹션에서는 그간 몰랐던 간송 전형필 선생을 다루고 있다. 간송은 일제시대때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여 우리나라에 남긴 분이다. 당시는 경매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일본으로 유출되는 문화재도 많았고, 도굴등을 통해, 또는 암시장을 통해 불법적으로도 수많은 우리 국보급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간송 선생은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경매에 나온 한국 문화재들은 모두 사비를 털어 일본인들보다 앞서 낙찰 받았다. 재밌는 일화 한토막.
어떤 거간꾼이 경기도 용인에 있는 친일파 송병준의 집을 지나다가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보고 뭔가 거래를 터보려고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밥을 얻어먹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하인이 겸재 정선이 그린 <해악전신첩> 이란 책자를 불쏘시개로 쓰려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얼른 빼앗아서 주인에게 팔라고 했단다. 그러자 주인은 장작값만 내고 가져가라고 해서 <해악전신첩>을 구입한 거간꾼이 간송에게 이 얘기를 전하고 보여주었다. 그러자 간송은 거간꾼이 부른 값의 열배를 주고 이 책을 샀다. "이렇게 귀한 물건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라는게 그 이유였다. 또한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첩이 일본 골동품 상회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기와집 25채값, 지금 화폐가치로 약 60~70억원을 주고 일본에서 사오기도 했다.







이렇게 간송이 반출을 막거나 도로 일본에서 사온 우리 문화재들 중에서 훗날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무려 12점이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10점,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4점이다. 이완용, 송병준 같은 나라를 팔아먹고 개인의 부귀영화와 영달을 누린 사람들이 있는반면, 간송처럼 사재를 털어가며 우리 문화재를 지켜온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후손으로서 당연히 그런 분들을 기억하고 기려야 하겠다. 몰랐었는데 그 유명한 훈민정음 해례본도 간송이 지킨 문화재중 하나라고 한다.

몇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해봤다. 이처럼 어렵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들로 구성되었고, 조선말기, 일제시대 때의 우리 조상들의 사회상을 들여다볼수 있는 귀한 자료가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어 읽기 어렵지 않았다.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이거나 혹은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궁금한 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만한 책이다.

 

 

이토록 아찔한 경성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출판 : 꿈을담는틀(꿈결) 201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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