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지켜봐오던 소녀를 납치한다. 그리고 세상과 격리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두사람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납치된 소녀는 처음에는 극심한 공포에 젖어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차츰 자신을 돌봐주는 납치범에 끌리게 된다...
어디선가 많이 봐오던 스토리다. 그렇다. 일본에서 발생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완전한 사육'을 시작으로 해서 이와 유사한 소설, 영화, 실화들이 수도없이 창작되고, 실제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납치되었다가 8년만에 돌아온 나타샤 캄푸쉬,
등교길에 납치되었다가 18년동안 성노예 생활을 하다 극적으로 탈출한 미국의 제이시 두가드
사건처럼 힘없는 여성, 특히 소녀들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성적 파트너로 만드는 패륜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나타샤 캄푸쉬는 감금생활 8년을 '3096'이라는 책으로 회상했고,
제이시 두가드는 '도둑맞은 인생'이란 책으로 심경을 고백했다. 이 책 '스톨런'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책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위 책들은 실제 피해자가 쓴 실화라는 점이고,
'스톨런'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위 책들을 다 읽어본 나로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이 소설같고, 소설이 사실같다.
'스톨런'은 부제에서 보는것과 같이 납치범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납치범을 처음
만났을때부터, 호감을 갖고 대화하다 커피에 탄 약을 먹고 의식을 잃어 납치당하는 순간,
세상과 고립된 곳에서 납치범과의 생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오심에서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 그러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세상과 부모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피해자 시각으로
납치범에게 얘기를 해주고 있다. 이 소녀의 감정이 소설의 핵심이다. 나를 납치한 이 사람은
사실 처음 봤을때 호감을 갖었었고, 사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악마처럼 느껴졌지만,
나중에 독사에 물린 나를 살리기위해 모든걸 다 바쳤던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되고 나니 이 사람이 가엾다. 그리고 마음이 간다...
결말부에 이 소녀를 살리기위해 병원에 데려간 납치범은 경찰에 자수를 하게된다. 감금됐던
시절 생활을 묻는 사람들은 소녀가 납치범에 일말의 동정심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소녀는 다시 이 세상에 이들과 어울려 살기위해 납치범은 흉악범이고, 감금됐던
시간동안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소녀는 납치범에게 전하지
못하는 편지를 통해 그럴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건가.
'스톨런'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나타샤 캄푸쉬가 쓴 '3096'과 비교가 된다. 등교길에 납치되어
8년동안 납치범에게 감금되어 살았던 나타샤 캄푸쉬는 그야말로 납치범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나를 납치했고, 때리고, 모욕하고, 자유를 뺏어갔지만 그 긴 시간동안 유일하게
나와 대화하고, 나를 도와주고, 먹여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나와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다.
탈출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납치범을 마냥 악당이라고, 흉악무도한 괴물이라고 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감정을 이해하거나 받아주지 못했다. 그리고는 간단한
한마디로 모든걸 결론지어 버렸다. '스톡홀름 신드롬'. 하지만 나타샤 캄푸쉬는 극구 부인했다.
자신의 감정은 결코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소설 '스톨런'에서도 피해 소녀는 부모곁으로 돌아와서 납치범이 자신을 흉악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납치되긴 했지만 진정으로 자기를 위해줬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이 안되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정의하고 정신치료를 하려는 사람들에
반감을 갖는다. 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고? 그럼 이 경우는 뭐라고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사랑할수도 미워
할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하나? 내가 남자다보니 피해소녀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어쨋든 중요한건 납치범의 행위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납치해서 감금하고 내 여자로 만든다? 철저한 보쌈정신으로 무장한 납치범
들이 아닐수 없다. 피해자야 그렇게 내사람으로 만들지라도, 긴세월동안 사랑하는 딸의 생사
조차 알지못하고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려 인생을 망치는 가족들의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건가
말이다. 남자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나는 납치범에게 징역10년을 선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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