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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벌초할땐 이렇게 중무장을..


선산이 전남 장성에 있다. 어릴적 아버지 따라 성묘다니던 추억을 떠올려보면 한마디로
암벽등반에
국토대장정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산소는 이쪽 산에, 증조할머니 산소는 저쪽
산에, 할아버지 산소는
건너마을에, 할머니 산소는 우리 산에...산을 두세개씩 넘어서야
나타나곤 했던, 그것도 산소라고
아는 사람만 알 정도의 평지에 대고 우리는 절을 하고,
술을 따르고 왔었다. 거기다 어떤 한곳은
습해서인지 갈때마다 한번씩 뱀을 발견하곤 해서
가기 무서웠던 기억도 난다. 이러저리 흩어져있던
산소들을 한곳에 모아 선산을 조성하는,
'산일'을 해야되는데, 해야되는데 하면서 수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실행하지 못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고.. 흩어져 있는 산소들을 이장해 오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던
거다. 어쨋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숙원사업이었던 산일은 기어이
해놓고 돌아가셨다.
그덕에 이제는 도로가 뚫린 우리 산 한곳에 모든 조상분들이 모여 계시니
이렇게 편할수가
없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형이 작은집 당숙과 함께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벌초를 하러갔다.
어차피 추석때 내려올걸 벌초하려 서울에서 왔다갔다 해야하고, 또 잘 사용하지 못하는
예초기
돌릴때마다 불안하고, 거기다 뉴스에 꼭 이맘때 벌초하다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잦다는 얘기가 들리는 터라 난 그냥 벌초대행을 맡겨버리는게 어떨까~ 생각중이었다.
형에게 얘기하니
그래도 벌초를 계기로 작은집 식구들도 보고, 우리 형제도 얼굴 한번 더보고
하는데 뭐하러 대행을
맡기냔다. 더구나 일도 그리 많지않은데. 그러고선 척척 예초기 돌릴
준비를 한다.
이번에 형이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왔다. 우리 선산은 양지바른 곳이라 뱀은 없는데
대신 항상
벌이 걱정이었던 터라 양봉칠때 입을법한 망사옷을 준비해온 것이다.




상의, 하의 모두 망사옷에 모자까지. 그래. 형은 완전무장 했다치고, 근데 벌이란게 그사람만
공격하는건 아니지않는가~ 옆에 달래달래 붙어있는 우리는 어떡하라고?

같은 자리에서 핸펀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하나는 노랗게, 하나는 파랗게 찍혔다. ㅡㅡ;

우리 두 형제 모두 예초기는 한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럴때 보면 형은 형이고, 장남은
장남인가 보다.
난 무서워서 예초기를 맬 엄두도 못내겠는데 형은 미숙하나마 시도라도 하는걸
보면... 예초기를 장만한 첫해엔
깎은 자리와 안깎은 자리가 별로 구별이 안됐었는데, 이제 3년이
지나고나니 형은 도사가 다됐다.
혼자서 봉분 7개와 주변을 두어시간동안 전부 밀었다. 예초기가
닿지 않는 곳이나 굵은 잔나무가 있는 곳은
낫으로~

형이 땀 뻘뻘 흘리며 예초기를 돌리는 동안 난 쇠스랑 하나 들고 베어진 풀들 긁어모아 버리는 일을
했다.
그거 하나 하는데도 어찌나 땀이 나던지..




하고나니 이렇게 개운하다.
일이 끝나고 나서 나누는 대화들..

1. 어머니 돌아가시면 어떤자리로 가시느냐.. ㅡㅡ;
    아버지랑 합묘하느냐 옆에 따로 들어가시느냐.. (들어가긴 어딜 들어간다고)
    전엔 선산으로 가지않고,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어달라시더니 요샌 선산으로 오시겠다고 한다.

2. 그 다음에 우리 자리는 어디냐..(형은 부모님 묘 밑으로 납골당을 조성해서 우리대 부터서는
    모두 화장하고
납골당으로 들어가잔다. 일리가 있다. 안그러면 차남인 나는 우리 선산에
     묻힐 자리나 있을려나 모를테니..

3. 우리대 다음에 벌초는 누가 하느냐.. (형은 아들이 하나있고, 나는 딸만 둘이다)
    애들이 제사는 지내기나 할까.. 꼭 죽어서 제삿밥을 얻어먹고 싶은건 아니지만 그나마
    제사라도 지내야 1년중 하루라도 나를 추억하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우리 꼬꼬나 꿀꿀이가
    시집가고 나서 제사건 혹은 묵상이건 나를 기념할련지 모르겠다.

이 포스트를 읽는 모든 분들, 이번 추석 무사히 잘 보내고 복귀하시길 바란다.
(우리 모두 가족들과 화목하게 보내고 옵시다. 싸우지들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