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독백. 남편 J가 어느날 갑자기 혼자 살고싶다고 했다.
"So...you're saying you want to divorce me? (그러니까...지금 이혼하자는 거야?)"
외국인 남편 J는 그렇다고 했다. 이유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않고 시간을 때우듯이
사는것만 같아서 견딜수가 없다는게 이유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밥먹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와서 아내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마치 자신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익숙한 환경과 사람을 떠나
혼자서 독립하고 싶다고... 좋다, 얼마든지 그럴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결혼을 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언제는 좋다고, 평생 사랑하며 알콩달콩 살자고, 국제결혼
까지 해놓고서 특별히 부부사이가 나쁜것도 아닌데 갑자기 독립하겠다며 이혼하자고 하면
상대방 아내는 뭐가 되는건가?
"도대체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지?"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학원 수강생으로 외국인 강사였던 'J'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사랑했고,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데다 애까지 딸린 그와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 만족하면서 잘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혼을
하잔다.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주인공, 작가는 쿨하게 Yes 하고 만다.
이혼녀, 그것도 외국인 남편과 살다가 헤어진 이혼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 변변한
직장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동안 남편에게 의지하며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재혼한 친정엄마 집에 들어가 혼자만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것을 다 잃어
버렸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어쩌면 잘된 일이라고~ 남편 말따나 정작 세상을 살면서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힘도, 의지도, 없었음을 깨닫고 더 늦기전에 자기도
독립해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남편의 결심에 동의한다. 이혼에 임하는 한 여성의
홀로서기 스토리, 작가 유수연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보통의 이혼에 관한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고있다.
성격차이, 경제적인 문제, 고부갈등도 없다. 이혼하는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이혼이 진행되는 기간에도, 판결후 완전히 남남이 된 후에도 서로 만나 섹스를 한다.
남편, 아니 전 남편은 재산분할이니, 위자료니 돈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한 소득이 있는터라
전 아내가 친정집을 나와 서울에서 방을 얻어 자리잡을수 있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내도 전 남편이 데리고 왔던 아들 -이젠 완전한 남이라고도 할수있는- 의 사춘기, 심리적
안정을 위해 내일처럼 신경을 쓴다.
이제 여자는 삶의 모든면에서 익숙했던 남자의 자취를 버리고 모든걸 혼자서 해 나가게 된다.
일단은 이혼에 관한 주위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고, -J를 욕하는 친정 부모와 친구들로부터
J를 옹호하는 이상한 상황부터 해결해야겠지 - 내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해야 하고, 형광등도
갈아 끼워야 하고, 공과금, 과태료를 비롯해 자동차 정비나 세차도 해야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
여자들중 대부분은 흔히 이런 귀찮은 것들, 또는 번거롭거나, 복잡한 것들을 스스로 처리하려는
경향보다 남편에게 떠밀고,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면서 사는 분들이 아주 많다. 그러다보니
어쩔수없이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게 되면 동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 한통 떼는것도
힘들어 하고, 세금이 많이 부과되었다고 구청에 전화해서 언성을 높이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남편과, 익숙했던 생활과의 이별로 인해 많은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나는 아무것도 잃지않았다"고 독백하는 작가의 심정을 조금은 알것 같다.
다만 스스로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 남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후에 깨달은
점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작가 허수연은 1978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다.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다. 한국에 돌아와 그때부터 번역일을 하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여기까지가 책에서
밝힌 작가의 이력이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햇갈렸지만 작가
소개를 보니 책 내용과 일치하는걸로 봐서 작가 허수연의 자전적 에세이란걸 알수 있었다.
8월 9일, 그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할때부터 11월 2일까지의 일기 형식으로 글을 써가다가
아래와 같은 글귀로 끝을 맺는다.
아무리 여러번 생각을 해도 나는 도저히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다. 분하다고 욕을 할수도 없다.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히려고 J가 일부러 그런 선택을 내린것은 아니다. 열심히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랑과 책임이라는 두 단어가 내 눈에는 그다지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살때는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혼은 어느날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찾아올수도 있다. 그럴때 이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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