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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헨리8세의 이후의 스토리, 글로 읽는 '튜더스'

처음에 다음뷰 책분야 1위 등극 기념으로 썼던 포스팅에서 '천일의 앤'을 인용했기에
시작했던 영국 왕실 이야기가 앤 볼린에서 끝냈어야 할것을 괜시리 여성편력가인
남편 헨리8세와 그의 여인들 얘기로 핀트를 옮겼다가 점점 주체할수 없게 커져 가고만
있다. 결국 오늘까지 3일 연속으로 영국의 왕들과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니 마치 내가
영국사에 해박한 사람이라도 된 모양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포스팅 하기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하며 글을 쓰는 입장이고, 그러다보니 헨리8세 이후 연결되는 이야기들이
어찌나 재밌던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헨리8세의 아버지 헨리7세때부터 헨리8세를
거쳐 오늘 소개할 에드워드6세, 메리1세, 엘리자베스1세에 이르기까지 집권기간을
'튜더스' 라 한다. 오늘 포스팅은 글로 보는 튜더스가 되겠다.


                                                          헨리8세

어제 포스팅에서 얘기했듯이 헨리8세는 여섯명의 왕비를 둔 여성편력이 심한 왕이었다.
그 중 두명의 아내를 직접 처형시키기도 했으니 아마 새로운 왕비로 정해진 여인들은
왕비가 된다는 기쁨보다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그런면에서 본다면 정략혼이었던
네번째 부인 클레브스의 앤이 결혼 7개월만에 이혼을 당하고 무사히(!) 생을 이어간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겠다. 이 이혼건으로 당시에 헨리8세의 총신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은
정적들에게 결혼을 성사시켰던 책임을 추궁당하고, 충성을 다바쳤던 헨리8세에 의해
처형당했으니 클레브스의 앤은 다행이었는지 몰라도 크롬웰에게는 비극이 되고말았다.

앤 볼린과의 결혼에 앞서 헨리8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헨리8세의 아버지 헨리7세는 30년간 잉글랜드의 왕위 자리를 놓고 벌이던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간의 장미전쟁을 끝내고 집권하여 그로부터 본격적인 튜더가의 왕위계승이
시작되었다.

  
 
                   
        랭커스터가의 문장. 빨간 장미
 
           요크가의 문장. 하얀 장미


(왕위 자리를 노리고 30년간 지속된 두 가문간의 전쟁은 문장으로 인해 장미전쟁이라
불린다.
영국의 귀족들은 집안을 상징하는 문장을 가지고 있는데 집안간의 혼인등으로
되면 문장 역시 두 문장이 합쳐져 새로운 문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훗날 엘리자베스1세 다음 왕인 제임스1세는 스코틀랜드 왕이기도 했는데 그러자
잉글랜드의 국기와
스코틀랜드의 국기가 합쳐져서 오늘날 영국국기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유럽 귀족들의 문장에 관한 설명은 굴뚝토끼님이 잘해주셨기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굴뚝토끼님의 문장 포스팅 바로가기

 
  엘리자베스때까지의 잉글랜드 국기
 
 제임스6세 통치기의 스코틀랜드 국기
 
             오늘날 영국 국기


원래는 헨리7세의 맏아들 아서경이 왕위계승권자였는데 갑작스레 병사하자
작은아들이었던 헨리8세가 후계자가 되어 튜더스가가 배출한 두번째 잉글랜드 왕이 된다.
이때 형수인 캐서린과 다시 결혼하는데 가톨릭의 교리상 아서와 결혼했었던 캐서린이
다시 헨리8세와 결혼할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허나 당시에는 종교가 순수했던 쪽이
아니라 상당히 정치적으로 기울고 부패했던 시대라 '결혼은 했으되 순결을 잃지않았다 '
는 캐서린의 서약만으로 교황의 관면(죄를 면해주는)을 받고 헨리8세와 결혼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딸 메리를 낳고 연이어 사산하며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8세는 급격히
애정이 식고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단행한다. 그런데 캐서린과의
결혼은 쉬웠으되 이혼은 쉽지않았다. 바로 캐서린이 신성로마제국의 왕 카를5세의
숙모뻘이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이 당시 교황을 좌지우지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교황이
쉽게 이혼을 허락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헨리8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하여 수장령을 선포하고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된다. (수장령 : 모든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라는 가톨릭의 교리에서 탈피하여 영국의 왕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포교)

하지만 헨리8세는 앤 볼린과의 사이에서도 딸만 하나를 낳았는데 이 딸이 바로 후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된다. 허나 당시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앤 볼린과의 사랑도 급격하게 식어 결국 제인 세이모어와 결혼하기 위해
앤 볼린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앤이 죽어도 이혼만은 할수 없다고 반발하자 앤을
처형시키고 제인과 결혼한다. 제인과의 사이에서는 드디어 고대하던 아들을 낳게되었다.
헨리8세 사후에 세번째 튜더스가의 왕이 된 에드워드 6세이다. 이쯤에서 헨리8세가
왜 그렇게 아들을 원했는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헨리8세의 문란한 여성관은
타고난 바람기가 원인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후계구도가 형성되지 않아 오랜세월
장미전쟁을 벌여왔던 시대를 직접 경험했던 헨리8세로서는 자신의 사후 또다시 영국이
분열되어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딸들이 아닌
확실한 왕자를 세워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랐다. 제인 세이모어는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지만 산욕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고 나서 어제 소개했던대로 클레브스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가 차례로 왕비 자리에 올랐다. 이 중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사실 오늘 얘기하기로 한 헨리8세 이후 후임 왕이 된 자식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헨리8세는 55세에 서거하였다. 죽는 순간까지 그의 모든 걱정은 어린 아들을 향한 것

뿐이었다고 한다.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면 또다시 권력싸움과 왕권쟁취가 치열해질 것은
자명했기에..그런데 우려대로 헨리8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6세는 고작 나이가
9살이었다. 너무 어렸기에 어머니 제인 시모어의 오빠, 즉 에드워드6세의 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을 하며 권력을 손에 쥐게된다. 에드워드6세가 아홉살에 왕위에
올라 열다섯살에 죽을때까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의미있는 변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사실 로마 가톨릭과 독립을 선언하며 스스로
가톨릭 교회의 수장에 올랐던 아버지 헨리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다.
캐서린과의 이혼건만 아니었다면 영국은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수장령 선포후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켰지만
교리나 전례부분에서 여전히 로마가톨릭과 같은 방향을 추진하는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8세의 사후 에드워드6세의 짧은 재임기간중 영국에서는
활발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성공회와 개신교가 득세하게 된다.

                                                       에드워드6세

종교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이었던 캐서린 파는 결혼후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헨리8세와
자주 논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항상 마지막엔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 노여움을 피했고,
첫째딸인 메리, 둘째딸인 엘리자베스와 헨리8세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화해라니...
그들이 무슨 문제가 있었단 건가? 하고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거다. 처음 헨리8세와
캐서린간의 유일한 딸이었던 메리는 공주의 신분이었고 왕자가 없었기에 당연히 왕위
계승권자였다. 그러다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면서 메리는 공주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됐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나면서는 아예 공주가 된 엘리자베스의 시종일을
했다고 한다. 항상 앤 볼린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하지만 앤 볼린이 처형된 이후 엘리자베스도 메리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진다. 앤이
반역자로 처형되었기에 딸인 엘리자베스도 공주의 지위를 잃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됐던것.
제인 시모어가 새 왕비로 들어오고 왕자 에드워드를 낳자 왕위 계승권자는 에드워드가
되었다. 후에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는 남편 헨리8세를 설득해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다시 공주 신분으로 복귀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았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훗날 메리나 엘리자베스가 여왕 자리에 앉을수가 없었을테니
정작 캐서린 파가 오늘날 영국을 세계적인 나라로 올려세운 조력자라 할수 있겠다.

에드워드 6세는 죽고나면 당연히 아들이나 딸이 없었기에 그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헨리8세의 첫째공주이자 에드워드6세의 이복 누나인 메리가 여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섭정을 하고있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후에 해리포터가 유년시절
이 집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농담이다 ㅡㅡ;)  는 에드워드6세를 협박해
자기 아들과 결혼한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강요한다. 제인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오촌 조카뻘인데 당연히 왕위계승권에서 메리나 엘리자베스보다 한참 밀리지만 에드워드는
죽으면서 왕위를 제인 그레이에게 넘기고 만다. 이로서 제인 그레이가 영국의 첫번째
여왕으로 등극하는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곧바로 귀족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메리를 옹립한다. 이로서 메리는 메리1세로 여왕의 자리에 앉고 제인 그레이는 즉위 9일만에
남편 길포드 더들리와 함께 런던탑에 유폐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아버지
존 더들리와 함께 모두 참수당한다. 이로서 '피의 여왕'이라 칭해지는 메리1세의 집권이
시작된다. 튜더스가의 네번째 왕이기도 하다. 정식 이름이 메리 튜더.
왜 메리1세가 '피의 여왕'일까?  첫번째 왕위계승권자이면서도 쫒겨났다가 국민들의
봉기로 집권하며 피로서 응징한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종교적인 이유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사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개신교도 였던 에드워드
재임기간중에 숱한 박해를 받았다. 그렇게 숨죽여 살다 자신이 집권하자 아버지 헨리8세의
종교 독립 이전의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복귀하고자 하였고, 이미 영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 성공회와 개신교도들의 막대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를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선
것이 훗날 그녀를 '피의 메리'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에드워드 6세의 재임기간 5년과
메리1세의 재임기간 5년 도합 10년간을 영국역사에서는 그다지 의미없이 답보상태에
빠진 기간으로 보고있다.


                                                      메리1세 여왕


메리는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를 죽는 순간까지 미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 아빠의 사랑받는 외동딸로, 공주로 부족함이 없이 자라다가 앤 볼린이 들어오면서
평화가 깨지고 엄마는 쫒겨나고, 자신도 공주에서 서출로 신분이 강등되고, 심지어
엘리자베스의 하녀로 생활을 했었던 유년시절의 기억때문에 좋아할수가 없었을거다.
그렇지만 42세의 나이로 죽는순간,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숨을 거둔다. 1558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 튜더가의 다섯번째 왕이다.

위키백과에서는 엘리자베스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
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
단절되었다



                                                 엘리자베스1세 여왕


엘리자베스 역시 언니 메리여왕처럼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처형당한 후
공주자리에서 쫒겨나 생활하다 헨리8세의 여섯번째 왕비 캐서린 파에 의해 다시 공주로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그후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6세, 메리1세의 통치기간동안 또다시
탄압을 이겨내야 했다. 어릴적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처형당한 것을 본 기억때문인지
재임기간중 "과인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처녀로 살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업적이 대단한데 그때까지 시끄러웠던 종교문제에 있어
가톨릭과 성공회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박해를 멈췄고, 애민정책을 실시하여 국민들의
에로사항을 경청했으며,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메리1세의 남편이자 에스파냐의
왕이었던 필리페2세의 침공을 막아내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문화도 활발히 꽃피었고, 미국 대륙에 식민지를 개설하여 버지니아
라 이름붙이고 아시아를 공략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자식이 없었고, 형제들도 없었기에 자연히 엘리자베스 이후로
튜더가의 집권이 끝나고 1603년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왕권 확립을 위해 오매불망 아들만 바랐던 헨리8세.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기위해
그토록 수많은 여인들을 왕비로 맞고, 죽이기를 반복했지만 정작 그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인 에드워드는 5년 재임기간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그나마 튜더가가
아닌 더들리가에게 권력을 뺏기고 만 유약한 왕이었다. 정작 헨리8세가 꿈꾸던 위대한
왕국, 위대한 왕은 그가 죽인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에 이르러 완성됐으니
이러한 사실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지금까지 헨리8세와 그의 여인들, 자식들 얘기를 읽으면서 아마도 가장 햇갈리는
부분이 이름이 아닐까 싶다. 동명 이인들이 원체 많은 탓에 성까지 잘보지 않으면
그 에드워드가 이 에드워드 같고, 아까 캐서린이 지금의 캐서린 같은... ㅡㅡ;
너무나 글이 길어져 여기서 영국왕족사는 마감을 짓는다. 혹시 훗날 기회가 된다면
튜더가가 집권하게 된 과정, 즉 장미전쟁과 헨리8세의 아버지 헨리7세때의
이야기를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혹시 지금까지 이틀간에 걸친 헨리8세의 이야기를 좀 더 깊게 알고싶으신 분이
있다면 아래 책을 추천한다.

헨리 8세와 여인들 세트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앨리슨 위어(Ailson Weir) / 박미영역
출판 : 루비박스 200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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