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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영화,읽은책

제주로 귀향한 번역가 김석희의 행복편지 '이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기대하지 않고 읽었던 책이었는데 귀한 보석을 발견한 소감이다. 전원주택, 전원생활, 귀농, 귀향 이런 테마로 출간된 수많은 책들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범한 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책을 들고 읽었던 이유는, 그 귀향의 지역이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항상 제주여행에 목말라 하던 나로서는 글 중에 소개된 제주 관광지 정보랄지, 숨겨진,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의 진면목을 접할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으로 읽게 된 책이다. 그런데 그런 정보도 물론 얻을수 있었지만 그보다도,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번역가로 활동중인 김석희 선생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제주에서 마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다음 대학원은 국문학과로 진학했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입문하였다. 초기에 소설을 쓰다 번역가로 돌아서 영어, 프랑스어, 일어 원작들을 번역했다.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허먼 멜빌의 <모비딕>,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쥘 베른의 <걸작선집>,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등등... 제 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수상했다.

 

젊은 시절 자기가 나고 자란 제주도가 하나의 커다란 장벽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어떻게하면 이 섬을 벗어날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살에 섬을 떠나 40년간 활동하다 회갑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향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심정일까? "고향의 산야와 바다를 품고 사는 것이 이리 행복할줄 알았다면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열심히, 치열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있기에 나이들어 귀향이 추하지 않고, 행복할수 있을 것이다. 딱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방법으로 귀향한 것처럼 보인다. 육지생활을 접고 제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어 사람들로 부비적대지 않고 여유있게 자연과 벗삼아 살아가는 모습은 중년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몇몇 블로거들이 생각나 더 반가웠다(아이엠피터님, 파르르님 같은).

 

제주시 애월읍에 너른 부지를 장만하고 바다와 한라산이 모두 보이는 조망권을 가진 집을 지었다. 몰랐는데 제주에서 한라산과 바다가 모두 보이는 곳이 그리 흔하지 않다고 한다. 우연히 제주지역 국가소유의 땅중에 노는 땅들을 택지로 민간에게 경매로 팔던 때가 있었는데 운좋게 좋은땅을 구입할수 있었다고. 그래서 제주도에 살고있던 고교동창들은 모두 부러워한단다. 평생 제주에 살고있는 자신들도 구하기 어려운 금싸라기 땅을 외지에서 살던 친구가 운좋게 나꿔채갔다고. 제주에 내려온 후, 이번에는 육지생활하며 사귄 친구들과 멀어지지 않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기위해 편지 형식을 빌어 '애월통신'이란 소식을 꾸준히 적어보냈다. 그게 2년을 거치면서 제법 분량이 쌓이자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책으로 묶어냈다고. 제목은 논어 첫머리에서 따왔다.

 

일신(一信)부터 육십신(六十信)까지 글들 속에는 닭서리 해먹던 어린시절 제주에서의 추억, 신구간, 영등제와 같은 제주만의 독특한 풍속, 작가 김훈같은 지인들부터 이사간 지역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교류담, 새로 들인 강아지 태풍이와 늙으신 노모를 비롯한 가족이야기들이 소소하게 담겨있다. 어찌보면 별 의미없는 일상을 일기처럼, 편지처럼, 블로그 포스팅처럼 끄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서 중년 남자의 애환과, 가족애, 그리고 책과 문학에 대한 열정, 오랜 세월 삶을 살아온 현명한 교훈등이 모두 녹아나 있다. 특히 아버지의 제사치룬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대목이 나오는 십오신에서는 가슴이 저릿해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암에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생을 정리하던 중에 문득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버지한테 잘못했던 일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겠지만 그중 몇가지는 이상하게도 늘 가슴속 한구석에 가시처럼 박혀있어 마음에 걸리던 것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설날때 외갓집에 세배하러 갔다가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띄웠는데 싸락눈이 섞인 바람에 연은 신나게 허공을 치솟았고, 그렇게 연을 날리며 길을 걸어 돌아왔다. 그런데 옆에서 걷던 아버지가 "나도 한번 해볼까?" 하면서 얼레를 받아가셨는데 한두번 실을 당기다가 그만 뚝 끊어지고 말았다. 연은 바람을 타고 훨훨 멀리 날아가 버렸는데 그 자리에서 울고, 불고 떼를 썼다. 그 대목을 옮겨본다.

 

연을 찾아다 달라고, 왜 그리 떼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가서 더 좋은 연을 만들어 주겠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달래고 어르는데도, 옆에서 어머니가 타이르고 야단까지 치는데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징징거리다 못해, 할아버지한테 가서 연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던 기억도 납니다. 결국 아버지는 바짓단을 걷어 올리더니 길가 돌담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밭은 듬성듬성 쌓인 눈으로 질퍽해서 걸음을 내딛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밭을 건너고 돌담을 넘고, 또 밭을 지나고 돌담을 넘고... 그렇게 수백미터를 걸어가서 아버지는 연을 찾아들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때쯤 이미 나는 잘못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끊어진 실을 잇고 연을 다시 날리면서 "엤다!"하고는 얼레는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한채 몇걸은 연을 날리며 가다가 슬그머니 실을 감아들였습니다.

 

그때 일이 왜 그렇게 큰 잘못으로 기억에 새겨져 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 어른이 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잊어버리셨을거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는데 의외로 아버지도 그때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고. 연을 찾으러 가다 질퍽한 밭이랑에 발이 빠져 구두를 더렵힌 일까지 기억하며 오히려 그때 일을 즐겁게 추억하셨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네가 고집피우는걸 보고 앞으로 사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호락호락하게 살지도 않겠구나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일게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이 밖에 지인에게 얻어키운 강아지 이야기도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일본 견종인 아키타가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아키타'라는 종으로 개량된 녀석인데 덩치가 크고, 유순한 성격인데 외모에서 주는 위압감 때문에 같은 개들이나,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도 한다. 옆집에 사는 서너살 먹은 개 두마리가 자주 저자네 집에 들어와 강아지 천둥이를 물고 괴롭혀서 속상한 나머지 저자가 강아지를 준 지인에게 넋두리를 했더니, 그 분이 웃으면서 1년만 참으라고 했단다. 의아하면서도 시간이 흘러 1년이 넘어가자 조그맣던 강아지가 어느새 큼직하게 무럭무럭 자라더니, 본성도 드러나면서 공격성까지 갖췄다고. 멋모르고 여전히 천둥이를 괴롭히러 온 옆집 개가 천둥이를 습관처럼 건드렸다가 매섭게 반격을하자 깜짝 놀라 자기집으로 달아났는데 천둥이가 끝까지 쫒아가서 응징을 했단다. 깨갱거리며 달아난 그 개들은 이후 저자네 집 근처에 얼씬도 안했다고~ 또 천둥이와 함께 산책을 나가면 돌아오는 길에 천둥이는 그 집 앞에 멈춰서서 한동안 으르렁거리며 경고를 날리고 온단다.

 

 

겨울철 제주에서만 맛볼수 있다는 자연산 방어회. 회는 클수록 맛이 좋다던데 이 방어도 참치처럼 부위별로 색도, 맛도 틀리단다. 이 책에서 방어회 이야기를 읽고나니 겨울철 제주도에 가서 꼭 방어회를 먹어보고 싶어진다. 아래 사진처럼 저자가 직접 스노클링을 하면서 작살로 고기를 잡기도 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지인들이 안믿을까봐 인증샷도 올렸다. 고기는 돔의 종류인 갓돔인데 무려 3키로짜리라고.

 

 

제주하면 또 빼놓을수 없는 풍경인 돌담길. 이 책에서 또 하나 얻을수 있는 귀한 소득은 처음 기대했던 대로 제주사람들만 알고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천혜의 자연경광, 산책로, 볼거리, 먹을거리등의 정보가 많다는 점이다. 14, 15, 16 올레길 정보도 상세하고, 철따라 변하는 제주의 자연환경도 생생하다. 난 제주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아니 꿈이라고 해야겠다. 학창시절 대학교 수학여행을 제주로 왔었고, 군 제대 이후 누나가 다니던 회사에서 제주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었기에 또 한번 관광을 왔었고, 3년전에 아내와 두딸과 함께 온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제약이 있어 내가 가고싶은 곳, 하고싶은 일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쯤 가능할지 모르지만(혼자 제주여행을 오면 가능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테고, 아마 아이들이 모두 자란후에 아내와 둘이 오게되면 가능할지도), 최소 일주일에서 길면 한달가량 제주에 머물면서 한라산도 등반하고, 올레길도 걸어보고, 오름도 올라보고, 해수욕도 해보고, 그렇게 제주의 자연을 만끽해보고 싶은 꿈이다.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 관광지 박물관 몇군데 돌아보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제대로 제주를 즐기고 싶다.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큰 기대없이 읽게 된 책이지만 나름 보물같은 책이됐다. 이 책을 지금은 평생 교직에 계시다 은퇴하시고 아는이 아무도 없는 시골 중소도시로 내려가 두분이서 알콩달콩 살고계신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선물해 드리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