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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소박한, 하지만 운치있는 조그만 사찰 담양 용흥사

주말에 가족들이랑 담양의 용흥사로 나들이 갔다온 포스팅을 하려다 뜬금없이
역사이야기로 흘러버렸다. 오늘은 본격적인 용흥사 이야기~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한 고장이라 가는 곳곳 쭉쭉 뻗은 대나무가 시원스레 반겨주는
정감가는 곳이다. 담양에 유명한 곳이 뭐가 있을까~ 대나무, 대나무 속에 밥을 쪄먹는
대통밥, 떡갈비, 그리고 메타세콰이어 길. 또 추월산. 대숲을 고즈넉히 산책하고 싶을때는
죽녹원이 제격이다. 몇번이고 담양을 다녀왔지만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사찰이
바로 용흥사였다. 아내가 사전에 검색을 해보고는 그곳 계곡이 여름철 인기있는 피서지
이기도 하고, 숙빈최씨가 기도를 하고나서 영조를 잉태한 곳이란걸 알아냈다. 고~~래?
그럼 거기 한번 가보자~ 하고 출발.




용흥사 가는 길.
담양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금새 찾을수 있었다. 물론 네비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
했겠지만.. ㅡㅡ;  그래도 이정표도 잘 돼있고, 큰도로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커다란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 저수지만 넘어가면 금방이다. 저수지 이름은 월산 저수지. 용흥사 계곡물을 갇어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어 있어 겨울의 운치를 느낄수 있었다. 
월산저수지만 넘어서면 계곡을 따라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늘어서있다. 겨울이라 찾는 이들이
없어서인지 난개발이라고 얼굴이 찌푸려지기보다는 저기서 촌닭시켜 먹으면 딱 좋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중에 날이 따뜻해지면 한번 다시와서 계곡에 발도 담그고, 촌닭도 먹고,
산책삼아 용흥사를 둘러보고 오는 하루 일과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여수에 살적엔 눈 구경을 못하다가 광주로 이사와서 올겨울 많은 눈에 신나하는 꼬맹이들.
이 날도 광주엔 없던 눈이 산에 올라갈수록 쌓여서 얼어있자 신이 났다. 가물어서 말라버린
계곡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컷!



지금도 딸들은 아빠곁에서 떨어질지를 모른다. 그래서 내 아내는 외출할때 참 편해하면서도
묘하게 나를 질투하는것 같다...




이제 도착했다. 이 계단이 용흥사로 올라가는 입구다. 어느 절이나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이
없다. 아니 사천왕문이 있음직한 곳에 한참 신축중인 집이 있는걸로 봐서 새로 만들고 있는듯
하다. 곳곳이 공사중이다. 생각했던것 만큼 작은 사찰이다. 옛문헌에 보면 숙빈최씨가 기도를
하고 영조를 잉태했다하여 꽤 유명해졌고, 절의 규모도 꽤 컷다는데 오늘날 왜이리 소박한
것일까?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 절의 역사 역시 참 기구하기 짝이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 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백제시대때 창건됐다는 설이 전해져온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백제때 창건됐다는 증거가 없다고도 한다. 전라도 지역의 많은 절들이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하고 용흥사 역시 그렇게 알려져있다.
하지만 조선후기때까지의 연혁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나 사료가 없다. 용흥사가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인 조선후기, 앞서 말했듯이 숙종대 숙빈최씨가 사가로 내쳐진 인현왕후
를 위해 치성을 들이다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입었는데 영수왕자를 낳았으나 병약하여 금새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 용흥사에서 오랫동안 기도를 들이고 회임을 해 마침내 영조를 낳게
됐다고 한다. 그 후로 본래 용구사였던 절의 이름이 용흥사로 바꼈고, 이때부터 절이 발전하여
50 여년간 산내 암자만도 일곱 곳이 새로 들어섰다. 하지만 기구한 운명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임진왜란때 전소됐다가 후에 부흥하면서 한때는 48동의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절이 위치한 용구산의 산세가 험하여 의병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는데 용흥사가
이들 의병들의 활동에 근거지가 된다하여 일본은 용흥사를 불태워 버렸다. 이후 1930년부터
십여년에 걸쳐 모정선사가 11동을 복원했으나 이번에는 6.25전쟁때 용구산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된다하여 국군이 다시 불태워 버렸다. 이후 2000년대까지 변변한 요사채나
전각 하나 없이 절터만 유지되어 오다가 지금의 주지스님인 진우스님이 부임한 후 차츰 사찰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중이다. 지금은 대웅전과 법당 한곳, 그리고 스님들과 보살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두곳 정도 세워져있었다. 그런 연유로 사천왕문도 이제 신축하고 있는듯...





대웅전의 모습만 봐도 이 절의 이름이 용흥사임을 알수 있겠다. 다른 곳과 달리 용머리가
현판 좌우로 떡~하니 여의주를 물고 전각을 지키고 있다. 큰 딸 꼬꼬가 "아빠, 왜 절 이름이
용흥사에요? 무슨뜻이에요?" 하고 물어보길래 "응, 흥할 흥자를 써서 용이 흥하다는 뜻인데,
그러니까...그러니까..음..." 말문이 턱 막힌다.
용이 흥한 절? 용이 흥할 절? 옛날엔 임금을 용으로 상징했는데 그 임금이 흥하라고 해서
용흥사? 그런데 흥하다는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건지... 고민끝에 내가 해준 답은 고작...
"응, 그건 옛날에 용이 있었는데 흥! 했대. 그래서 용 흥! 사야.."  ^^;;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고, 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네끼리 용흥!사, 용흥!사
하고 되뇌인다..  ㅡㅡ;;;




대웅전 뒤로 산신각이 서있다. 그리고 산신각 밑에는 제대 비슷한게 있고 고사를 지낸듯 음식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번엔 아내가 묻는다. "왜 절에서 산신을 모셔?" 그러게.. 절은 부처님을
모시는 곳인데 왜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있을까? 혹시 관심없어 모르고 지나쳤던 분들도
있을거고, 그 이유를 명쾌히 아시는 분들도 있겠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닌데다 불교문화에
해박한 편도 아니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맞을수도 틀릴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불교 역시 한국의 토착신앙은 아니고 중국에서 전래되어 들어온 외래신앙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옛부터 산을 숭배하는 사상이 강했는데 산에는
산신이 있고, 산신이 인간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불교가 전래되어 들어와 토착화 하는
과정에서 산신이 호법신중(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한 신)의 하나로 수용되었다가 
지금은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며, 가족 모두 질병없이 건강하게 부귀장수를 기원하는 신으로
인식되어 진다. 이런 산신을 모시는 전각을 산신각이라고 하고, 거의 모든 절에는 산신각이
있다. 특히 산신각 안의 산신은 백발의 할아버지 모양을 하고있고, 소년들이나 호랑이와
함께 그려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호랑이 역시 산에 사는 영험한 동물로 토테미즘 신앙에서
신격화가 이루어졌는데 산신이 호랑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헥헥.. 그런데 왜 가족들은 모르는게 있으면 나는 당연히 알고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건지..





문양이 예뻐서 아내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어디가든지 데세랄을 신주단지 모시듯 갖고 다닌다.
나를 그렇게 모셔준다면 그깟 데세랄 열개도 사줄텐데... ㅡㅡ;






끝으로 종무소 벽에 붙여진 마음 다스리는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한번 읽어보면서
마음을 정화시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