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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숙빈 최씨가 기도를 해 영조를 낳았다는, 담양의 용흥사

지난 일요일 담양의 용흥사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용흥사는 그리 유명한 사찰은 아니다. 나도 이번에 처음 가게된 곳인데 아내 쌈닭의
사전조사에 의하면, 드라마 '동이'로 유명한 숙종대 숙빈 최씨가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린 덕에 아들을 잉태하였고, 그 아들이 후에 왕(영조)이 되면서 이 절도 함께 유명해
졌다고 한다. 원래 용구사였던 절의 이름도 영조이후에 용흥사로 개명되었다.

 




영조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워낙 역사라는게 재밌는지라 -
잠시 역사이야기를 해보자. 숙종의 첫번째 부인은 인경왕후다. 숙종과 동갑이었고 열살때
혼례를 치루고 열넷에 숙종이 보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천연두를 앓고 스무살때
죽었다. 숙종과의 사이에 딸만 둘을 낳았다. 인경왕후가 죽자 숙종은 두번째 부인을 맞는데
바로 인현왕후다. 인현왕후 역시 아이를 낳지 못해 후계가 불안해지자, 궁녀 신분으로
승은을 입었으나 대비의 미움을 받아 사가로 내쳐졌던 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권하게 된다. 당시 조정은 당파싸움이 극에 달해있었는데 인현왕후는 서인세력이었고,
궁녀 옥정은 남인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궁에 돌아온 옥정은 뛰어난 미모와 지략으로
왕의 총애를 받게되면서 내명부 종4품 숙원으로, 다시 2년만에 정2품 소의로 올라서고,
아들 윤을 낳으면서 정1품 희빈에 봉해진다.

남인세력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희빈을 내세워 정국을 장악하려하고, 이에 서인들이
남인을 견제하려 하지만 아들을 낳지못한 인현왕후와 함께 서인들도 왕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다. 장희빈의 아들 윤을 세자로 삼는다는 교지에 불가하다고 상소를 올린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죽임을 당하고, 서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유배를 가면서 남인이 권력을 틀어쥐게
됐고, 장희빈 역시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폐비시키고 스스로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장희빈과
남인들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숙종은 다시 서인들을 등용하며 남인을 견제하였고, 서인들에
힘을 실어주고자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복위한 후 8년만에 병사한다.
이후 숙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에 의한것이라 하여 장희빈에게도 사약을 내려
죽였다. 하지만 일부 사서에서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밝혀져 숙종에게 사약을
받은것이 아니라 장희빈의 처형을 명한 후에 조사를 벌여 희빈의 처소에서 저주의 흔적을
찾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은 장희빈을 죽이려고 이미 정해놓고 증거를 짜맞추기
했다는 뜻일게다. 아무리 죄가 크다한들 세자의 어머니를 죽이는 문제를 두고 당시 서인들
사이에서도 뜻이 갈려 노론과 소론이 서로 반목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인현왕후 복위때부터
노론과 소인은 갈라섰다).

이렇게 정국이 인현왕후 대 장희빈, 서인 대 남인의 싸움으로 정신없을때 또다른 후궁이
등장한다. 무수리로 궁에 들어와 숙종의 승은을 입어 숙빈이 된 최씨다. 인현왕후가 폐서인
당하고 장희빈이 왕비로 있을때인 1693년에 숙원으로 승격하고 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아들이
병사했다. 이후 인현왕후가 복위한 1694년에 또다시 아들 금을 낳고 숙의로 봉해졌다가
이듬해 귀인이 되고, 1699년 정1품 숙빈이 된다. 인현왕후와 가까웠다고 일러지고, 장희빈이
왕비였을때 갖은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 복위 이후 함께 장희빈을 공격한 듯 하다.

숙종 사후에 세자였던 장희빈의 아들 윤이 즉위하여 경종이 되었는데, 서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서인들은 장희빈의 아들보다 숙빈최씨의 아들 금을 왕위에 앉히려고 압박을 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아들이 없는틈을 타 세자가 없으니 세제를 세우라고 하였고,
경종이 4년만에 승하하자 세제가 왕위를 잇는다. 바로 영조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조선의 역사는 매 시기 시기가 모두 한편의 드라마다. 그러기에 각종 사극이 쉬지않고
방영되면서 인기를 끌고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에 영조가 낳은 아들 사도세자는 영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많은 설들이 있지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는 사도세자가
경종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하면서 아버지 영조와 노론 세력들과 적이 됐다는 설이있다.
사도세자를 내세워 권력을 차지하려는 소론세력과 아버지 영조를 비롯한 노론세력의
싸움에 희생된 것으로 보는 설이다.

잠깐 하려던 역사이야기가 길어졌다. 용흥사 이야기는 내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