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부터 인기를 끌던 사극열풍이 잠잠해지기는 커녕 갈수록 브라운관을 점령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서 기인한 역사 드라마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드라마든 간에 우리 사극의 공간적 배경은 주로 궁궐일때가 많다.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 거기에 당파싸움과 외척세력들까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들이다. 그런데 어느 사극이든 이들 못지않게, 혹은 이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궁궐의 꽃이 있었으니, 바로 궁녀들이다.
어느 시대건 수백명씩 기거했던 궁녀들은 때로는 우연히 왕과 하룻밤을 보내고 신분상승의 신데렐라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중전과 후궁들의 대립에서 상대의 동향을 파악하는 스파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대장금이나 의녀들처럼 그들 스스로가 사극의 주인공이 되어 활약하기도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후궁>에서도 조여정의 노출연기에 가려져 부각되지 않지만 내시와 궁녀들의 애환을 깊숙히 다루고 있다. 궁녀라고 다같은 궁녀도 아니다. 철저한 업무분담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궁녀에 대해 아는게 없다. 기껏해야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를 주워듣고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이 정사에 관심이 없고 궁녀들과 문란한 유흥에만 빠져있어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됐다~는 설과 함께, 신라군이 처들어오자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밑도끝도 없고 근거도 없는 말만 떠올릴 뿐이다. 조선시대때도 궐안의 궁녀는 수백이었다. 하물며 인구가 턱없이 적었던 삼국시대때 삼천궁녀가 있었다는건 허무맹랑한 얘기일뿐 아니라 사서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수 없다. 백제와 적이었던 신라의 역사가들이 지어낸 소설일뿐.
"궁궐에 핀 비밀의 꽃"이라는 표지 부제와 띠지에 적힌 "궁녀의 금지된 성과 사랑, 끝없는 음모와 암투까지!"라는 글귀에 혹해서 책을 읽게됐다. 뭔가를 기대하면서~
but~ 은근히 기대했던 내용은 한낱 바램으로만 끝나버렸다. 일종의 밑밥 이었다! 뭔가 야시시한 분위기를 풍겨놓고 정작 책 내용은 무척 건전한 편이다. 말 그대로 궁녀의 모든것을 자료에 근거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이 궁녀가 되는가, 궁녀는 몇살때 입궐할까, 궁안에서의 생활은 어떨까, 허용되는 일과 금기되는 일, 궁녀들은 평소 어떤 일들을 할까, 월급은 얼마나 받을까 등등... 마지막 6장에서 '궁녀의 성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대부분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있는 내용들이다.
궁녀는 처녀여야 하고, 처녀로 늙어가야 하는데 피끓는 젊은 처자들이 간혹 남자 대용으로 서로간에 동성애를 즐기기도 하고, 내시들과 눈이 맞아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기도 하고, 종친들이 궁에 드나들다 궁녀와 썸씽이 생기기도 한다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궁녀가 왕이 아닌 외간남자와 사랑을 하게되면 상상할수 없을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한마디로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한다는 것~
속대전 형전, 간범 편에서는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자와 여자는 모두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한다. 출산이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형을 집행하는 예를 따르지않고 즉시 집행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에 사형을 선고받은 여자가 임신을 하고있다면 아기가 태어나고 100일동안 형 집행을 연기한다는 관습이 있었는데 궁녀가 간통할 경우에는 이 규정을 따르지 않고 즉시 참수했다고 하니 얼마나 큰 죄로 간주했는지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단순히 왕의 여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몸가짐을 잘못 했다고? 그건 아닌것 같다. 조선시대 왕족들은 항상 독살의 위험과 공포속에서 병적으로 의심하며 살아갔다. 헌데 궁안의 그것도 왕의 수발을 드는 궁녀들이 역심을 품은 자들과 내통이라도 한다면 그만큼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자명한 일. 궁녀들이 스스로 역심을 품지 않는다해도 그런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거나 몸을 주거나 하게되면 이용 당할 위험이 크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엄금하고 있다고 봐야하겠다.
그런데 모든 궁녀가 위와 같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는건 아니었다고 한다. 왕과 직접 접촉하거나 왕의 수발을 들거나,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 상궁, 나인들은 엄히 외간남자들과의 잠자리를 금지했지만, 상궁이나 나인들의 하녀 역할을 하던 방자나 무수리들이 간통을 하다 발각되면 참수까지는 하지않고 곤장 100대, 강제 노역 3년같은 중형에 처해졌다.
가난과 굶주림이 당장의 문제가 되던 때, 여자들이 꿀수있는 가장 큰 꿈은 궁녀가 되는 것이었다. 궁녀가 되면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거기다 사가의 부모를 위해 식량과 물품을 보내줄수도 있었으니. 궁녀들은 조직이 엄격하고 질서정연하게 유지되었는데 경국대전과 같은 법률서에서도 궁녀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궁녀는 맡은 역할에 따라 지밀 나인, 침방 나인, 수방 나인, 세수간 나인, 생과방 나인, 내소주방 나인, 외소주방 나인, 세답방 나인으로 구별되었다. 나인들은 25~35년이 지난후 상궁으로 승격되었는데 상궁이 되면 '마마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상궁이 되지못한 나인들은 '항아님'이라고 불렸다. 관례전의 나인들은 각시라고 불렸는데 지밀, 침방, 수방의 각시들은 생각시라고 하여 일반 각시들보다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각 방 별로 상궁 > 나인 > 생각시 > 각시 순으로 서열이 매겨졌다. 이 밖에 상궁들 중에서 궁녀들의 처소별로 전체를 총괄하는 제조상궁이 있었고, 규율을 담당하는 감찰상궁이라는 보직도 있었다. 몇몇 영화에서 보면 감찰상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무서운 존재로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읽다보면 처음 기대했던 야릇~한 내용은 별로 없지만 책 속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간 궁녀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싶기도 하고 그 세계 나름대로의 질서에 호기심도 일어난다. 또 궁녀들 중에서 유명했던 인물들의 일화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는 신명호, 조선시대사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조선시대 왕과 왕실 문화를 연구해오다 주로 왕실에서 소외되었던 계층과 인물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 이 아닌 <조선왕비실록>을 집필하기도 했다고. 저서로는 <조선공주실록>,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왕을 위한 변명>, <조선의 궁궐에서 일했던 사람들, 궁>등이 있고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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