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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한순간에 바람핀 남편이 되버린 나

난 원래 밤에 늦게 자는 편이다.
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회사일이 끝난후에도 책을 읽다보면 12시를 훌쩍 넘기기 마련이니
평균적으로 새벽 한시정도에 자는듯 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그 일도 아마 그시간쯤의
어느날이었다.

저 지금 자요 ^^

낯선 번호의 문자 한 통.
응? 누구지? 누군데 잔다고 하는거야? 발신자 표시에 이름이 뜨지않고 전화번호만 뜨는걸로 봐서는
전화번호부에 입력된 번호는 아닌것이다. 근데 사실 눈웃음 살살치며, 다정하게 보낸 저 메시지에
가슴 설레는 남자들도 많겠지만 (나도 그랬지만 ^^;), 누굴까, 누굴까 하고 고민하지는 않았다.
저런 문자를 나한테 보낼 여자도 없거니와 (근데 여잔지 어떻게 알아. 남잘수도 있잖아), 딱봐도
모르는 번호니 당연히 잘못 전송되온 문자일테다. 아마도 사랑에 빠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청춘
커플의 여자쪽이, 므흣한 눈웃음을 날리며 남자쪽한테 꼬리를 살랑거리는 중인 모양이다.
사실 오래된 커플들은 저런 문자질(!)을 하지 않는법이니...
괜시리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답장을 보냈다.

저도 지금 자요 ^^

헉...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난 정말 다른뜻 아무것도 없었다. 문자 잘못보내놓고 당황해할 상대에게,
또는 잘못 보낸지도 모르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핸드폰을 모아들고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불쌍한 중생에게 나름 재치있게 "문자 잘못 보내셨어요~"라는 신호를 보낸것 뿐이다. 그날 밤 이 일이
며칠후 사단이 날줄 어찌 알았으랴~~

내 아내 쌈닭은, 박통시절 보안사보다 더 까다롭게 통신검열을 시행한다. 핸드폰 통화목록부터 문자
목록에 내용까지 일일이 확인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처음에는 별로 책잡힐 것도 없어서 내버려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기분 나쁜거다. 날 의심하는거 같고. 그래서 나도 쌈닭의 핸드폰을 보려하니
이게 뭥미? 문자 내역은 물론 통화목록까지 모조리 삭제 되어있다. 첨엔 우연인줄 알았다. 근데 몇번
이고 핸드폰을 볼때마다 삭제되어 있어서 물어보니 자기는 통화 습관일 뿐이란다. 문자가 오면 확인
하고 지우는게.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 습관 아닌가? 날 만나기 전 처녀적 습관이 몸에 밴것이다.
어떤 이유로 그런 습관이 생기게 된건지는 굳이 묻지않아도 알 법하다.

이주만에 집에 간 바로 그 날이었다. 반갑게 가족과 재회하고, 애들의 재롱에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던 그 때, 습관처럼 내 핸드폰을 검열하던 쌈닭의 표정이 굳어진다.
"얘 누구야?"
"응? 누구?"
"이거 말이야. 저 지금자요~"
아차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 문자가 어제, 오늘 온것도 아니고 아마 일주일이나 지난것 같은데,
그리고 답장을 보내놓고 나도 잊고 있었던 거다. 아내가 보면 오해할만한 문자 아닌가. 괜한 오해가
없게하려면 지워 버렸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평소 습관이 문자를 지우고 하질 않다
보니. 이젠 별수없다.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수 밖에.
"아~ 그거? 나도 몰라. 잘못 온 문자같은데?"
"근데 왜 당신이 이렇게 답장을 보내?"  ㅡ_ㅡ^
"뭐, 재밌잖아"
"이거 여잔데? 솔직히 말해. 누구야? 당신 바람 피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랑 바람피운다고.. 아니 섬에 처박혀 있는데, 바람도 여자가 있어야
필거아냐!"
방방 뜨며 항변했지만 쌈닭의 싸늘한 눈빛은 바뀌지를 않는다.
그날 이주만에 견우와 직녀가 해후하듯 만난 밤이었지만, 아무일도 없이 밤이 지나갔다.
손만 잡고 자자해도 싫단다. 옆에 붙기라도 할라치면 저 지금자요가 누구냐고 따진다.



다음날 아침에도 상황은 변하질 않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갔다 와보니 내 베게는 멀리 내팽개쳐져 있고, 그 자리를 쿠션이 대신하고
있다.

결국 그날 이후 한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내는 무슨일만 있으면 대화하다가도, 전화통화 하다가도,
문자로 채팅하다가도, 저지금자요녀를 갖다 붙인다. 뭐하냐고 물어서 밥먹고있다고 하면
"저지금자요랑 같이 먹어?" 이러고, 우리 이번주에 영화볼까? 하면 "저지금자요랑 같이 봐" 이런다.
바람에 ㅂ자도 모르고 살던 내가, 일평생 집과 회사밖에 모르며 우직하게 소처럼 살고있는 내가,
문자 한번 잘못 보내는 바람에 '물증은 없지만 심증이 가는 바람피는 남편'이 되어 고개 숙이며
살고있다.

이 포스팅 역시 검열에 잘리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여긴 내 일기장이라구!

남편분들, 문자 관리 잘할지어다.
그리고, 혹여라도 바람피지 말자.